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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漵 칼럼

<호매칼럼>'구지가' 성희롱 논란

‘구지가’ 성희롱 논란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2018년 07월 25일(수) 00:00
지난 16일 인천시 교육청에 따르면 인천 모 사립고 교사가 최근 국가인권위원회에 학교 측으로부터 받은 조치가 부당하다며 민원을 제기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이(58)씨는 고전문학 수업 중 성희롱발언을 했다는 의혹으로 교체 조치된 것이다. 이는 ‘구지가’에 나오는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라’란 대목에서 거북이 머리가 남성의 성기인 ‘남근’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급기야 졸업생들의 탄원이 제기되었고, 문학에서 해석의 표현논란이 붉어진 사건이 제기된 것이다. 구지가에 대한 해석의 정석은 없다. 난생신화와 함께 건국신화의 하나인 구지가는 노동요이며 인구번성을 상징하는 거북이 신앙이 결합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수업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할 의도로 발언했다면 지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남근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다’는 전제하에 학습을 진행했다면 그를 빌미로 성희롱을 적용해 교체 조치한 것은 일방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했음에도 말이다.
문학작품을 다루며 위 사례와 같이 단순하게 ‘남근’과 ‘여근’에 대한 발언이 성희롱이라 한다면 어느 교사가 학생들과 작품을 다룰 수 있겠는가. 문학이 인성함양에 지대한 영향력이 가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성한 수업시간에 외설을 논하거나 가르치지는 않았을 터이니 말이다.
만 16세 학생들에게 대학교수들의 학설을 발제해 가르친 것이 문제가 된다는 학교 측의 주장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처음부터 교과과정에서 만 16세 학생들만을 위한 고대가요부터 시작하여 맞춤형 교재가 있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학교 측에서 말하는 부적절한 내용이 없는 것들로 말이다.
이런 사건을 통해서 시대상을 진단해 볼 수 있지 않을까싶다. ‘구지가’가 ‘미투’에 연루되리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미투는 성폭력 피해 경험을 공유하며 생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며 우리는 함께 연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의미를 둔 것이며, 사회 각 분야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권력형 성폭력의 심각성에 주목하는 계기가 된 것이 미투 운동이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이에 따른 문제 또한 제기되고 있다. 다름 아닌 ‘젠더 갈등’ 문제와 ‘여성들의 사회참여 제한’을 표방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무고죄(誣告罪)’가 문제되고 있다. 무고죄는 허위사실을 신고하므로 성립하는 죄로서 남을 해코지 할 목적이 있는 나쁜 짓이 아니던가.
이번 사건은 무고죄와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며, 인권과 성을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인권에는 남녀가 평등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에는 분명한 남녀의 구분이 명확한 것이다. 구지가를 가르치고 공부하면서 인권과 성의 기준이 구분되지 않았다면 이는 학문하는 자세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성에 대한 정체성이 의심스러운 일이다.
인간 창조에 대한 성경 창세기 기록은 남자와 여자로 쓰고 있다. 이에 남자는 male(수컷), 여자는 female(암컷)으로 말이다. 이는 양과 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로마의 남성 조각상은 성기를 강조하였고, 불교의 구약인 힌두교 네팔은 종교성을 남녀 성합에서 찾았던 것이다.
이처럼 신화적인 배경에서 사람을 말할 때 남녀의 명확한 성을 말하고 있다. 이후 가치적인 삶을 말할 때는 암컷과 수컷으로 말하지 않고, 남성과 여성으로, 남자와 여자로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인권과 윤리와 도덕이 삶의 잣대가 되어 행복한 삶의 목적과 의무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구지가는 가락국의 건국신화이다. 신화를 읽고 해석할 때 신성한 창조행위를 male과 female로 읽고 해석하지 못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거북이 머리를 남근으로 해석할 때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한다면 그 수치심을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성희롱(sexual harassment)은 ‘타인에게 정신적·신체적으로 성적인 불쾌감과 피해를 주는 행위’라 하고 있는 데 피해자의 인격을 끌어와 구지가로 수치심을 갖게 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을 부당한 대우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말이다.
무엇이든지 격이 있고, 정도가 있는 것이다. 그 도에서 지나치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억지가 될 수 있다. 문학과 예술이라 해서 성이 자유로운 영역이 아니다. 문학과 예술의 가치를 잃어버린 표현과 작품은 항상 그 가치 기준에서 평가받고 있다는 것을 서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성 소수자의 축제가 남긴 것 또한 묵과할 수 없다. 보듬고 같이 아파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표현을 빌미로 문란한 성적 행위를 통과해야할 의식은 아니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가다듬어야 할 때이다. 인권과 성이 무엇인지, 정체성과 문학이 무엇인지 성숙한 아름다움으로 발전해야 할 때이다.
/ 정홍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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