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꽃 피는 고흥반도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
2018년 05월 16일(수)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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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은 어떻게 오는가 알고 싶다면 남도 바닷가를 돌아보면 어떨까. 굽이굽이 마을과 산자락마다 연보랏빛 꽃등이 지성으로 핀 ‘불칼’을 보게 될 것이다. 송수권 시인은 오동꽃을 불칼이라 불렀다. 잠시 그의 시를 음미해본다.
“오월은 도가풍이 찍어내는/사심 없는 빈 배와 같다//저 보아라 시나브로/청청 하늘에 던지는 불칼//어느 강마을을 넘는지/또 우레소리 귀청을 찢는다”(‘오동꽃’ 부분)
오동꽃이 피면 오월의 광주가 생각나고, 하늘에 던지는 불칼이 생각난다고 한 오동꽃의 서러운 이미지는 시인의 작품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오동꽃이 피는 마을마다, 가슴마다 오월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2주기에 참여하지 못한 인천의 송준용 시인이 늦게 산영을 찾게 되었다. 함께 고인의 산소를 돌아보고 아주 오랜 시인과의 만남이 시작된 전설 같은 현장을 찾아 이야기 세 마당을 누리고자 한다.
고흥만 방조제를 거쳐 녹동, 녹동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녹동을 벗어나 첫 번째 이야기 장소는 오마간척지 한센인 추모공원이다. 풍남반도 끝자락에서 소록도를 바라보며 조성된 추모공원은 방문객이 없었고, 공원 입구 마늘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인적의 다였다.
천천히 공원에 올라서니 현장만큼이나 애처롭게 펼쳐진 갯벌과 핏줄 같은 방파제를 가로질러 달리는 차량의 행렬만이 무상함을 더해주었다. 공원 중앙에 세워진 기념탑에서 사진 한 장 남기고 개척단 부단장 김형주의 애곡(아으 슬프도다!)을 읊으며 망망히 소록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애처롭기 한이 없다.
“오호 통재라! 오천 원생은 곡하노라! 우리의 비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오마도 간척공사를 1962년 7월 10일에 착공하였으나 세계적인 대 기만극으로 1964년 5월 25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기에 여기에 그 유래를 새겨 만천하에 고하노라”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으로 잘 알려진 1962년 오마도 사건은 오마도 앞바다를 메워 소록도 한센인들이 생활터전으로 살려했지만 완공직전 군사정부의 개입으로 간척지에서 쫓겨난 사건이다.
당시 소록도에는 정착지가 필요한 환자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생활터전을 위한 대안으로 병원장 군의관 출신 조창원의 주도로 시작됐지만 공화당 신형식의 농간과 지역주민들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버림받아야했던 지옥 같은 사건이었다.
330만평의 농지는 결국 1989년 주민들에게 분양됐고 강탈당한 땅에는 신식 농기계가 황발이(농게)처럼 기어 다니고 있다. 이보다 더 슬플 수는 없다. 누구든지 공원에 가게 된다면 공원 자체가 슬프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 부조나 사진들은 이미 퇴색되어 잊히는 우리들 모습이었고, 역사현장에는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물망초만 써 놓았을 뿐이다.
우리들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오리목나무 새싹마저 슬픈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두 번째 이야기 장소로 향하였다. 낙조로 유명한 바닷가 가화리(加禾里)에 있는 여의촌과 황촌마을을 찾았다. 한 때는 극단 패가 머물고 배따라기를 촬영한 마을, 벼꽃을 더한다는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마을이다.
갯장어, 미역, 취나물 등 특산물이 풍성하여 부촌이기도 한 가화리에는 300년이 넘는 보호수가 즐비하고 아름드리 해송이 방풍림으로 잘 조성된 멋스러운 곳인데 송 시인은 정자마루에 올라 한참이나 시름에 잠겼다. 그의 속내를 다 알 수 없지만 ‘그 옛날의 사랑이야기’가 있음직한 분위기에서 연신 목이 마르다고 보채기만 하였다.
세 번째 이야기 장소는 음료를 사기위해 들른 도화면 소재지 오치리길이다. 처음으로 공개하는 송수권 시인과 송준용 시인의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가 오치리이었다. 송수권 시인은 도화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친척인 송준용 시인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고, 송준용 시인은 당시 도화중학교(3회) 학생으로 시인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더란다.
나이는 서너 살 차이였지만 집안 항렬을 무시하고 지금까지 형님으로 행세하다 간 사람이 송수권이라고 송준용 시인은 옛 기억을 풀어놓았다. “나는 늘 문학의 조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인의 땅 오치리, 그가 다녔던 중학교 정문에 차를 대놓았다. 별관(옛 본관) 건물에서 공부한 시인은 이제 70고개를 넘은 오치리가 낳은 시인이다.
시인에게 김은수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저 ‘석수포의 비화’를 말이다. 석수포 주민들이 나로도 장날 함께 배 타고 돌아오는 길에 돌풍을 만나 수락도(수래기, 수리섬) 앞에서 당한 참사를 노래로 만든 것이 ‘석수포 비화’이다. 어느새 시인은 “정유년 모진 폭풍 이십 수 곧은 님들/배와 함께 석수개에 설흔혼 여의시니” 2절 가사를 읊고 있었다.
우리는 옛 기억을 더듬어 슬프지만 기억해야할 오동꽃의 길, 고흥반도를 그렇게 돌아왔다.
기억하는 것이 신앙이듯이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말고 잘 기억하는 것도 소중한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정 홍 순 시인
“오월은 도가풍이 찍어내는/사심 없는 빈 배와 같다//저 보아라 시나브로/청청 하늘에 던지는 불칼//어느 강마을을 넘는지/또 우레소리 귀청을 찢는다”(‘오동꽃’ 부분)
오동꽃이 피면 오월의 광주가 생각나고, 하늘에 던지는 불칼이 생각난다고 한 오동꽃의 서러운 이미지는 시인의 작품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오동꽃이 피는 마을마다, 가슴마다 오월은 오고 있었던 것이다.
송수권 시인의 2주기에 참여하지 못한 인천의 송준용 시인이 늦게 산영을 찾게 되었다. 함께 고인의 산소를 돌아보고 아주 오랜 시인과의 만남이 시작된 전설 같은 현장을 찾아 이야기 세 마당을 누리고자 한다.
고흥만 방조제를 거쳐 녹동, 녹동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녹동을 벗어나 첫 번째 이야기 장소는 오마간척지 한센인 추모공원이다. 풍남반도 끝자락에서 소록도를 바라보며 조성된 추모공원은 방문객이 없었고, 공원 입구 마늘밭에서 일하는 할머니가 인적의 다였다.
천천히 공원에 올라서니 현장만큼이나 애처롭게 펼쳐진 갯벌과 핏줄 같은 방파제를 가로질러 달리는 차량의 행렬만이 무상함을 더해주었다. 공원 중앙에 세워진 기념탑에서 사진 한 장 남기고 개척단 부단장 김형주의 애곡(아으 슬프도다!)을 읊으며 망망히 소록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애처롭기 한이 없다.
“오호 통재라! 오천 원생은 곡하노라! 우리의 비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오마도 간척공사를 1962년 7월 10일에 착공하였으나 세계적인 대 기만극으로 1964년 5월 25일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기에 여기에 그 유래를 새겨 만천하에 고하노라”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으로 잘 알려진 1962년 오마도 사건은 오마도 앞바다를 메워 소록도 한센인들이 생활터전으로 살려했지만 완공직전 군사정부의 개입으로 간척지에서 쫓겨난 사건이다.
당시 소록도에는 정착지가 필요한 환자들이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생활터전을 위한 대안으로 병원장 군의관 출신 조창원의 주도로 시작됐지만 공화당 신형식의 농간과 지역주민들의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두 번 세 번 버림받아야했던 지옥 같은 사건이었다.
330만평의 농지는 결국 1989년 주민들에게 분양됐고 강탈당한 땅에는 신식 농기계가 황발이(농게)처럼 기어 다니고 있다. 이보다 더 슬플 수는 없다. 누구든지 공원에 가게 된다면 공원 자체가 슬프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 부조나 사진들은 이미 퇴색되어 잊히는 우리들 모습이었고, 역사현장에는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는 물망초만 써 놓았을 뿐이다.
우리들의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오리목나무 새싹마저 슬픈 오후의 햇빛을 받으며 두 번째 이야기 장소로 향하였다. 낙조로 유명한 바닷가 가화리(加禾里)에 있는 여의촌과 황촌마을을 찾았다. 한 때는 극단 패가 머물고 배따라기를 촬영한 마을, 벼꽃을 더한다는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마을이다.
갯장어, 미역, 취나물 등 특산물이 풍성하여 부촌이기도 한 가화리에는 300년이 넘는 보호수가 즐비하고 아름드리 해송이 방풍림으로 잘 조성된 멋스러운 곳인데 송 시인은 정자마루에 올라 한참이나 시름에 잠겼다. 그의 속내를 다 알 수 없지만 ‘그 옛날의 사랑이야기’가 있음직한 분위기에서 연신 목이 마르다고 보채기만 하였다.
세 번째 이야기 장소는 음료를 사기위해 들른 도화면 소재지 오치리길이다. 처음으로 공개하는 송수권 시인과 송준용 시인의 만남이 이루어진 장소가 오치리이었다. 송수권 시인은 도화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친척인 송준용 시인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고, 송준용 시인은 당시 도화중학교(3회) 학생으로 시인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더란다.
나이는 서너 살 차이였지만 집안 항렬을 무시하고 지금까지 형님으로 행세하다 간 사람이 송수권이라고 송준용 시인은 옛 기억을 풀어놓았다. “나는 늘 문학의 조수”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시인의 땅 오치리, 그가 다녔던 중학교 정문에 차를 대놓았다. 별관(옛 본관) 건물에서 공부한 시인은 이제 70고개를 넘은 오치리가 낳은 시인이다.
시인에게 김은수 선생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저 ‘석수포의 비화’를 말이다. 석수포 주민들이 나로도 장날 함께 배 타고 돌아오는 길에 돌풍을 만나 수락도(수래기, 수리섬) 앞에서 당한 참사를 노래로 만든 것이 ‘석수포 비화’이다. 어느새 시인은 “정유년 모진 폭풍 이십 수 곧은 님들/배와 함께 석수개에 설흔혼 여의시니” 2절 가사를 읊고 있었다.
우리는 옛 기억을 더듬어 슬프지만 기억해야할 오동꽃의 길, 고흥반도를 그렇게 돌아왔다.
기억하는 것이 신앙이듯이 너무 쉽게 잊어버리지 말고 잘 기억하는 것도 소중한 우리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정 홍 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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