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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漵 칼럼

둘이면 더 깊은 물을 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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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면 더 깊은 물을 푼다 / 정홍순 시인
2016-08-14 오전 8:31:50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무더위 속에서도 들판에는 곡식들이 이삭을 마련하느라 힘겹다. 이런 때 물관리가 참 중요하다. 적절하게 논을 말렸다가 물을 담아 주어야 이삭이 충실하게 잘 되기 때문이다. 논이라 해서 항시 물을 가득 실어놓는다면 병충해라든지 힘없는 벼가 넘어지는 도복으로 인해 소출이 그만큼 감소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둠벙(웅덩이)논이 별로 없지만 경지정리 전에는 물을 가두기 위해 둠벙(둔벙)이 딸린 논이 많았었다. 특히 천수답은 둠벙 없이 농사짓기가 곤란했다. 둠벙에서 물을 퍼 올려 모내기, 물대기를 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때 쓰는 농기구로 용두레라는 것이 있었다.

     

    용두레는 통나무를 배 모양으로 길쭉하게 파서 몸통을 만든 뒤 그 가운데 양쪽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는 나뭇가지를 끼우고 여기에 끈을 맸다. 긴 작대기 3개의 끝을 모아 원뿔 모양으로 세운 꼭대기에 이 끈을 매어 몸통을 적당히 들어 올리게 했다. 통나무가 귀한 곳에서는 나무판으로 직사각형의 통을 짜고 바닥에 긴 자루를 달아 사용하기도 한다.

     

    혼자서 물을 푸다가 둠벙 물이 깊어지면 맞두레를 사용하였다. 맞두레는 글자 그대로 목판처럼 바닥이 좁고 위가 넓은 나무그릇 네 귀퉁이에 줄을 달아, 두 사람이 두 줄씩 마주서서 잡고 호흡을 맞추면서 물을 떠올린다. ‘어리 하나’하면 ‘올체’하고, ‘어리 둘’하면 ‘올체’하면서 장단을 맞추며 보통 천 두레(2만 리터) 정도 물을 펐다.

     

    천 두레를 한 메기라 하는데 천을 다 채우지 아니하고 구백구십구 두레를 한 메기로 하여 풍년의 복을 빌며 열 두레를 덤으로 퍼주었다. 이는 소농시절의 풍경이지만 얼마나 정겹고 아름다운 정이 묻어있는지를 두레 품앗이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삶이었다. 이런 농경문화가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자동이라는 직선문화가 우리 사회에 다량의 물신을 숭배하기에 이르렀다. 조금은 부족하고 소량이라 할지라도 수동이라는 곡선문화를 굴종시켰고, 삼켜버렸다는 말이다. 시대의 이기가 문명의 발달로 나타날지라도 정신은 변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패러다임의 변화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문화(文化)는 소통의 증거이다.

     

    소통에 대하여 성경에 바울은 특히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자들에게 당부하기를 조용히 집에서 남편으로부터 배우라고 하였다. 이에 준하는 우리말로 ‘서방(書房)’이라는 말이 있다. 글방도련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글을 읽고, 읽어주는 사람관계가 소통하는 문화인데 지금은 남편을 하대하여 쓰는 말로 남아있다.

     

    사라져가는 옛 문화의 가교를 위해 지방자치별로 ‘문화의 거리’를 지정하여 육성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순천시도 구시가지 활성화를 위한 방안으로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문화예술야시장이 개설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창출 콘텐츠 사업이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이는 수익사업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순천의 문화, 역사, 전통에 주력하는 역할로 자연생태 관광이나 체험 못지않게 얼과 정신을 읽히는 프로그램으로 공고히 뒷받침해주고 있는 주력해야할 중요사업이다. 이러한 사업이 몇 개 주요 관, 단체가 주도하려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양한 소통이 부재한 것에는 문화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치 갈면 한 섬 먹고, 두 치 갈면 두 섬 먹는다’는 말이 있다. 땅심을 깊이 하라는 말처럼 생각과 의견이 깊어지려면 다양한 의견수렴이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간담회가 자주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생각과 의견을 제공한 사람은 없고, 관과 단체가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써 먹었다면 사탄의 것인 직선이 곡선을 죽인 것과 같은 사례이다. 물론 개별적으로 다 손잡아 주라는 말이 아니다.

     

    이에 순천시는 머릿수에 너무 민감하지 말아야 한다. 문화와 종교가 정치에 부합되면 결국 썩고 말기 때문이다. 문화 사업에는 꼼수가 필요치 않다. 가면 갈수록 사람들은 순수한 문화를 찾고 있으며, 외면하지 않는다. 정치당략으로 빚어내는 문화가 아니라 아주 오랜 전통을 기리는 문화, 거기에 순천시가 있기를 바란다.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6-08-14 08:31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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