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불쌍하지 아니한가 |
2015년 11월 04일(수) 11: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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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전남도민일보]정홍순 순천희락교회목사/시인= 교정의 단풍이 타고 있는 나무 밑에서 한 청년이 흐느끼고 있다. 답답한 마음에 너의 슬픔이 무엇이냐 물었다. 희망이 없어서 이 지경이라 하였다. 그의 눈에서는 호곡하는 현실의 죽음, 현 정부에서 제일 불쌍한 이들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창조미래라는 말은 귀가 밝아지는 말이다. 하지만 몸부림치며 살아도 좀 더 나아질 수 없는 미래라면 허울 좋은 구호일 뿐이다. 기득권이라는 세 싸움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기층 소민들의 몫이었다. 어쩌다 꽃잎처럼 던져본 이들의 몸부림을 그냥 우리들은 비적이라 했을 뿐이다.
비적이 힘이 있으면 비적 떼를 이뤄 떼거리 힘을 어거지로 밀어 넣기도 하였다 어쩌다 딴 세상 바라고 맞서던 그들 그들의 이름으로는 환영받지 못하고 선량치 않은 이야기 결말은 늘 그랬다//...//꽃이 진다 우리들 몸에서 꽃이 떨어진다 비루한 꽃들을 던져 비적이 쓰러지던 것처럼 음지까지 다 떨어지고 난 우리들 땅에 돌, 나무, 풀, 평온의 날이 다시 오는 날까지 비적한 꽃은 꽃으로만 불릴 수 없다(졸시, 「한때는 비적이었다」부분)
학제개편을 청년들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보아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댈 뿐이다. 현실은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어야하고 미래는 현실로 적합하게 올 수 있어야 한다.
학제개편 그 이유인 즉, 만혼과 저출산의 원인은 청년들이 직장생활 하는 연령이 높기 때문이며, 10년간 약 100조원의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저출산에 대한 효과가 미비하여 재정정책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이에 따라 학제개편-조기졸업-조기취업-조기결혼-조기출산이란 조기형식의 그럴듯한 공식이 나온 것이다.
공식대로 인생이 살아진다고 보는 것은 큰 오해다. 이러한 산술이 어떤 법칙대로 작용한대해도 상관없는 부류들은 걱정도 눈물도 없을 것이다. 툭하면 외국 사례가 어떻고 경제개발협력국가가 어떻고 비교 적용하느라 바쁘기 만할 뿐이다. 아무리 좋은 교육제도를 가져와도 내용은 우리의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은 교육부재가 아니라 살 일이 막막하다는 것을 손가락 깨물며 생각해봐야 할 때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하였다. 제일 만만한 것이 교육제도란 말인가. 참교육 운운하며 일선에 섰던 사람들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정치적이라는 꼬리를 달게 되었으며 목숨 거는 교육열을 꼬드겨 밥그릇소리만 요란한 진상에 불쌍한 청년이 이 나라 교정의 뜰에서 울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청년들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리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외침이 오늘의 현실상황을 꼭 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지금 이 나라의 청년들이 낙망하고 있다. 희망의 정치, 희망의 교육, 희망의 종교가 무너지고 있다. 성경에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분노하는 자식들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청년들에게 증명되는 삶을 보이라고 당부하였다. “인생이 물질의 종이 아닌 것이/우리에 의해서 증명되어야 한다.//권력이 정의가 아닌 것이/종내에 그것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우리로 증명되어야 한다.//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간을 멸망시키지/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한국청년에게 고함」부분)
그렇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처럼 청년들에게 미래의 힘과 삶의 의미를 북돋아 줘야한다. 두둑을 갈라내는 청무처럼 자라나게 다 쏟아줘야 한다.
<본 칼럼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창조미래라는 말은 귀가 밝아지는 말이다. 하지만 몸부림치며 살아도 좀 더 나아질 수 없는 미래라면 허울 좋은 구호일 뿐이다. 기득권이라는 세 싸움에서 피해자는 언제나 기층 소민들의 몫이었다. 어쩌다 꽃잎처럼 던져본 이들의 몸부림을 그냥 우리들은 비적이라 했을 뿐이다.
비적이 힘이 있으면 비적 떼를 이뤄 떼거리 힘을 어거지로 밀어 넣기도 하였다 어쩌다 딴 세상 바라고 맞서던 그들 그들의 이름으로는 환영받지 못하고 선량치 않은 이야기 결말은 늘 그랬다//...//꽃이 진다 우리들 몸에서 꽃이 떨어진다 비루한 꽃들을 던져 비적이 쓰러지던 것처럼 음지까지 다 떨어지고 난 우리들 땅에 돌, 나무, 풀, 평온의 날이 다시 오는 날까지 비적한 꽃은 꽃으로만 불릴 수 없다(졸시, 「한때는 비적이었다」부분)
학제개편을 청년들에게 물어보고 또 물어보아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댈 뿐이다. 현실은 합리적이고 타당성이 있어야하고 미래는 현실로 적합하게 올 수 있어야 한다.
학제개편 그 이유인 즉, 만혼과 저출산의 원인은 청년들이 직장생활 하는 연령이 높기 때문이며, 10년간 약 100조원의 예산을 쏟아 부었음에도 저출산에 대한 효과가 미비하여 재정정책만 가지고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이에 따라 학제개편-조기졸업-조기취업-조기결혼-조기출산이란 조기형식의 그럴듯한 공식이 나온 것이다.
공식대로 인생이 살아진다고 보는 것은 큰 오해다. 이러한 산술이 어떤 법칙대로 작용한대해도 상관없는 부류들은 걱정도 눈물도 없을 것이다. 툭하면 외국 사례가 어떻고 경제개발협력국가가 어떻고 비교 적용하느라 바쁘기 만할 뿐이다. 아무리 좋은 교육제도를 가져와도 내용은 우리의 것이어야 하지 않는가. 지금은 교육부재가 아니라 살 일이 막막하다는 것을 손가락 깨물며 생각해봐야 할 때다.
교육은 백년대계라 하였다. 제일 만만한 것이 교육제도란 말인가. 참교육 운운하며 일선에 섰던 사람들은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정치적이라는 꼬리를 달게 되었으며 목숨 거는 교육열을 꼬드겨 밥그릇소리만 요란한 진상에 불쌍한 청년이 이 나라 교정의 뜰에서 울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청년들에게 고함>이란 글에서 “진리는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으리라.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라고 하였다.
선생의 외침이 오늘의 현실상황을 꼭 집어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지금 이 나라의 청년들이 낙망하고 있다. 희망의 정치, 희망의 교육, 희망의 종교가 무너지고 있다. 성경에도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분노하는 자식들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청년들에게 증명되는 삶을 보이라고 당부하였다. “인생이 물질의 종이 아닌 것이/우리에 의해서 증명되어야 한다.//권력이 정의가 아닌 것이/종내에 그것이 이기지 못하는 것이/우리로 증명되어야 한다.//불의의 세력이 결코 인간을 멸망시키지/못하는 것이 우리로 인하여 증명되어야 한다”(「한국청년에게 고함」부분)
그렇다. 우리는 지금 위대한 스승들의 가르침처럼 청년들에게 미래의 힘과 삶의 의미를 북돋아 줘야한다. 두둑을 갈라내는 청무처럼 자라나게 다 쏟아줘야 한다.
<본 칼럼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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