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암 성자 이세종 선생을 기리며 |
2015년 10월 21일(수) 1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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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전남도민일보]정홍순 순천희락교회 목사/시인= 화순 운주사에 대해서는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터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수도원적 신앙을 발흥한 등광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도 민중들에 의하여 이룩되었다는 것이 운주사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민중신앙, 또 하나의 유적이란 지금도 등광리 사람들이 흠모하는 李空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운동이다. 이세종 선생을 정경옥 교수는 <한국의 성인>이라 찬사하기도 했다. 선생은 1880년 등광리에서 출생하여 마흔이 돼서야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후부터 청빈과 구제를 실천하며 살았다.
선생이 머슴살이로 모은 100마지기 가까운 재산을 아낌없이 환원하고 남은 유품으로는 바가지 3개정도였으니 선생을 기려 도암면에서는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고 이러한 청빈과 구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이 가지고 있었던 덕은 믿음과 행함을 실현하려는 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동양적 자비사상으로 모든 미물에까지 애정을 버리지 않는 창조질서, 환경보존운동의 일환이라 할만하다. 선생의 마지막 유언도 자연을 떠나지 말라 하였는데 “언덕을 벗 삼고, 천기로 집 삼고, 만물로 밥 삼으라”고 하였다.
선생이 가르치고 삶으로 보여준 특성이라면 성성(聖性)에 있다.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아는 문제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의 뚜렷한 구도적인 삶은 이단사상도 배격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살았음이 밝혀지지만 널리 보급되지 않은 아쉬움이 크다.
선생은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사람으로 살았다. 평등과 아울러 명예심을 버리고 지극한 민중적 자세로 산 것이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지혜로 성경을 볼 수 있었는데 선생의 성경공부는 많은 사람들도 참여하게 하였다. 광주 목사들도 70리길을 걸어 가담하였는데 최흥종, 강순명, 백영흠 씨 등이 그들이다.
선생은 성경연구의 기본을 통독에 두었으며 해석은 성경으로 태도는 전심전력을 다하라 하였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이라 하여 기복적인 것을 거부하였다. 선생은 신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너머 한새골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고행적인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1942년 2월(음) 63세로 별세할 때까지 신앙생활 20년 동안 선생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고 오직 프란체스코와 같은 신앙자세로 살다간 성인이다. 더러는 산중파(山中派)라 하여 그들의 신앙을 기피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이는 정치참여보다는 사회참여, 구제 등으로 기성교회 조직을 기피한 것과 병이 들어도 약을 쓰지 않는 것, 순결사상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선생의 신앙계승을 이어 등광리에는 지금도 신도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으며 광주 등광원, 귀일원과 같은 조직적이지 않은 신앙인들의 사회봉사 참여는 편파주의, 이기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같은 현실에서 덮어버릴 수 없는 일이기도하다.
한 성인의 신앙정신을 미화하거나 우상시해서는 안 될 것이나 등광리에서 이룩한 민중적 섬김과 참여종교를 묻혀두기는 너무 귀한 지역문화 유산임이 틀림없다.
운주사와 같은 민중적 신앙유산처럼 기독교 유산도 등광리에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에 중요성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화순군민 뿐만 아니라 이제는 모두가 다시 한 번 눈을 돌려 문화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13년 11월 생가 복원사업을 시작으로 선생을 기리는 활발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화순군은 문화와 충절의 고장답게 용강리와 등광리가 민중종교의 문화유적임을 널리 알릴뿐만 아니라 승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본 칼럼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민중신앙, 또 하나의 유적이란 지금도 등광리 사람들이 흠모하는 李空 이세종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신앙운동이다. 이세종 선생을 정경옥 교수는 <한국의 성인>이라 찬사하기도 했다. 선생은 1880년 등광리에서 출생하여 마흔이 돼서야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복음을 받아들인 후부터 청빈과 구제를 실천하며 살았다.
선생이 머슴살이로 모은 100마지기 가까운 재산을 아낌없이 환원하고 남은 유품으로는 바가지 3개정도였으니 선생을 기려 도암면에서는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고 이러한 청빈과 구제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극찬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선생이 가지고 있었던 덕은 믿음과 행함을 실현하려는 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동양적 자비사상으로 모든 미물에까지 애정을 버리지 않는 창조질서, 환경보존운동의 일환이라 할만하다. 선생의 마지막 유언도 자연을 떠나지 말라 하였는데 “언덕을 벗 삼고, 천기로 집 삼고, 만물로 밥 삼으라”고 하였다.
선생이 가르치고 삶으로 보여준 특성이라면 성성(聖性)에 있다. 성령 받은 사람이라면 먹는 문제, 입는 문제, 아는 문제까지도 초월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선생의 뚜렷한 구도적인 삶은 이단사상도 배격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살았음이 밝혀지지만 널리 보급되지 않은 아쉬움이 크다.
선생은 지나칠 정도로 겸손한 사람으로 살았다. 평등과 아울러 명예심을 버리고 지극한 민중적 자세로 산 것이다.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지혜로 성경을 볼 수 있었는데 선생의 성경공부는 많은 사람들도 참여하게 하였다. 광주 목사들도 70리길을 걸어 가담하였는데 최흥종, 강순명, 백영흠 씨 등이 그들이다.
선생은 성경연구의 기본을 통독에 두었으며 해석은 성경으로 태도는 전심전력을 다하라 하였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뜻을 헤아려 기다리는 것이라 하여 기복적인 것을 거부하였다. 선생은 신사참배를 피해 화학산 너머 한새골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고행적인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1942년 2월(음) 63세로 별세할 때까지 신앙생활 20년 동안 선생의 변화는 놀라운 것이었고 오직 프란체스코와 같은 신앙자세로 살다간 성인이다. 더러는 산중파(山中派)라 하여 그들의 신앙을 기피하는 경향도 없지 않았다. 이는 정치참여보다는 사회참여, 구제 등으로 기성교회 조직을 기피한 것과 병이 들어도 약을 쓰지 않는 것, 순결사상으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일 뿐이다.
하지만 선생의 신앙계승을 이어 등광리에는 지금도 신도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으며 광주 등광원, 귀일원과 같은 조직적이지 않은 신앙인들의 사회봉사 참여는 편파주의, 이기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요즘 같은 현실에서 덮어버릴 수 없는 일이기도하다.
한 성인의 신앙정신을 미화하거나 우상시해서는 안 될 것이나 등광리에서 이룩한 민중적 섬김과 참여종교를 묻혀두기는 너무 귀한 지역문화 유산임이 틀림없다.
운주사와 같은 민중적 신앙유산처럼 기독교 유산도 등광리에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에 중요성을 두지 않을 수 없다. 화순군민 뿐만 아니라 이제는 모두가 다시 한 번 눈을 돌려 문화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2013년 11월 생가 복원사업을 시작으로 선생을 기리는 활발한 운동이 일어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화순군은 문화와 충절의 고장답게 용강리와 등광리가 민중종교의 문화유적임을 널리 알릴뿐만 아니라 승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본 칼럼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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