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의 문장에서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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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2월 28일(수)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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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 못지않게 바삐 움직인 사람들이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전반에 걸쳐 평창이라는 기회를 선용하기 위해 배나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 가운데 지역 인사들의 얼굴을 방송을 통해 보게 됐다. 무슨 일일까. 단순히 바쁜 군정(郡政)을 뒤로하고 올림픽경기를 관람하고자 평창에 갔을까.
그럴 리는 만무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바쳐 헌신한 두 수녀님(마리안느와 마가렛)에게 노벨평화상을 주십사하고 홍보하러 갔던 것이다. 마더 테레사 못지않게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우리에게 너무 소중한 분들이다. 숭고한 삶을 세계인의 가슴에 기록하고자 평창까지 달려간 그 행보를 기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테레사는 한 줄의 성경을 붙잡고, 은혜 받아 평생을 살았다고 했다. 이처럼 한 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이제 평창은 세계 역사 속에 한 줄이듯이,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종교를 떠나 우리의 역사와 삶에 한 줄인 것이다.
삶의 자리라는 것이 다 있을 터 그래서 너 서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 귀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문장에서의 단어나, 인생에 있어서의 자리가 매 한가지이다. 억지스럽지 않고, 생뚱맞지 않은 역사의 증험 자 같이 살아있는 단어가 한 줄, 한 문장을 이루어 준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수상한 뒤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나섰다. 끝내 몇 곳을 수정하기로 하고, 번역자는 번역문학의 당위성을 거론하며 다시 잠잠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번역문학은 1895년 ‘아라비안나이트, Arabian Night’를 번역한 ‘유옥역젼’과 선교사 게일이 번역한 ‘텬로력뎡’(천로역정)이다. 자국인이 번역한 것으로 치면 순한글의 필사본으로 쓴 ‘유옥역젼’이 최초라 할 수 있다.
번역문학은 대개 외국문학을 자국어로 번역하는 경우와 자국문학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경우인데 전자를 주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선교사 게일(James Scarth Gale)과 같이 외국인이 번역해준 경우에서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번역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게일(奇一)은 4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살면서 전국토를 12번이나 여행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행의 목적은 생활풍습을 이해하기 위해, 다시 말하면 한 줄의 문장을 위해 발품을 수없이 팔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성경도 번역되었는데 ‘신역신구약전서’이다. 게일은 다른 번역자들과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다. ‘축자적’(literal) 번역과는 달리 ‘조선어풍’(朝鮮語風)이라 하여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성경의 내용을 가감 없이,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히브리-영어식 문장이 아니라 부드럽고 쉬우며 매끄럽게 흘러가는 조선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독자적 노선을 걷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개인적으로 ‘신역신구약전서’를 번역하게 되었다.
필자는 영인본(1986)을 열어 그의 생각대로 조선어풍 한 줄을 만나 너무 깊은 감동을 받게 되었다. 마태복음 3장 12절 “뎌가키를들고打作마당을나뷔질하야알穀은庫間드리고”라는 번역을 보게 되었다. 키질은 키내림과 나비질이라는 말로 쓰는데 키내림은 쓸어내릴 때를, 나비질은 까부를 때를 말하는 것이다.
개역개정판 성경처럼 “정하게 하사” 보다는 순우리말인 “나비질”이 얼마나 우리말다운가를 새삼 느끼게 한다. 이러한 우리 생활풍습을 잘 눈에 두어 번역해낸 게일의 솜씨야말로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고수의 일품을 보는 듯해 그 한 수를 배우고자하는 것이다. “푸덕푸덕 키질 소리에/산속으로 단풍바람이 산막을 적시고/들깨가 뒹굴어 앉은/멍석이 새까맣다//헝겊쪼가리 풀 먹여 붙이다 너덜난/마산할미 키가/한 마당 쓸어내는 동안/매가 허공에 정지하고 떴다//고수들의 날/할미의 키내림하던 키가/나비질하며 맞서서 허공으로 오른다”(졸시, ‘키질하는 날’ 전문)
이처럼 우리들 곁에는 자신들의 생애를 바쳐 남을 이롭게 하고자 덕을 베푸는 이들이 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처럼 평생 간호사를 업으로 하여 생명을 돌보는 일과, 단 한 줄의 문장을 위하여 조선어풍을 일관하였던 게일과 같은 이웃들은 진정 우리들의 고수가 아니겠는가.
평창올림픽은 분명 평화의 새 역사를 쓰게 되는 우리의 한 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공연히 트집 아닌 트집을 부리며 정략에 힘쓰는 소인배들, 저 하수들의 검불이 사라지도록 키질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정홍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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