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홍순 시인
한 개의 자와 먹통으로 지어지는 것이 한국건축이며, 구조가 매우 복잡하지만 일정 규제 없이 성조 하는 것이 한국건축의 특징이다.
껍질이 벗겨진 둥굴이를 꺽쇠로 고정하고 먹줄을 놓아 대자귀(선자귀)와 중자귀로 기둥이나 들보를 다듬어내는 모습은 가히 예술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 이를 두고 범부 김정설은 음양론을 강론하며 국가에서 음악이나 건축을 장려하였다면 세계적으로 우수하였을 한국문화의 특수성이라 하였다.
런던 대영박물관 한편에 자리한 한국관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공수하여 만든 사랑방 삼 칸의 아름다움 앞에서 오랫동안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건축의 풍미 때문이었다. 한국의 멋과 문화를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라는 곳에서 견주어 볼 수 있었던 것으로 자긍심이 흘러나오기 충분하였다.
우리의 것이라서 막연히 좋은 것이 아니었다. 문화라는 것은 다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것은 버리거나 없애야하는 것이기에 한옥은 단순히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이기 전에 무덤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읽듯이 문명이라는 큰 자리에서 삼 칸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상하나가 잘 못 길들여져 당쟁(이기설과 주기설)이 끊임없던 이조시대를 누구도 건너뛸 수 있거나 역사에서 엿가락처럼 한 도막으로 분질러 내버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는 우리들의 정신과 역사성을 나무랐던 것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고 통탄하였다.
지극히 한국적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과 정신으로 배양된 것으로 순수한 것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전통으로 살아 있으며, 발전된 것이고, 거슬리지 않는 것들이다. 이러한 한국의 미를 참멋이라 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참멋에 취한 사람이 있다면 필자는 단연코 한창기(1936-1997) 선생을 말하고 싶다. 선생은 1936년 보성군 벌교 지곡에서 태어나 벌교초, 순천중, 광주고, 서울법대를 졸업하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최초 동양 지사장을 지내며 세일즈계의 신화를 남긴 선생은 1976년 ‘뿌리깊은나무’를 창간하여 지성인들의 상징이 되기도 하였다.
1972년부터 민화 전시, 판소리 음악회를 개최하며 전통문화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쏟았고, 잊혀져가는 전통문화 옹기, 찻그릇, 반상기 등을 제작하여 보급했을 뿐만 아니라 6500여점의 유물을 모으기도 하여 지금은 낙안에 있는 ‘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선생이 얼마나 전통문화에 심혈을 기울였는가를 찾아볼 수 있는데 우리의 것들을 위해 살다간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다. 그 가운데 본인이 모으지 못한 것, 선생이 작고한 후 유족들과 재단이 구례에서 백경 김무규의 고택을 원형 그대로 옮겨 온 것이다.
선생은 1980년 이 고택을 보고 한순간에 매료되었고, 26년이 지나 박물관으로 이거 되었다. 백경 김무규 선생은 단소와 거문고의 명인으로 전라남도 중요무형문화재 제83호 구례향제줄풍류 예능보유자였다. 고택의 사랑채에 딸린 누마루는 영화 ‘서편제’의 한 장면을 담은 곳이기도 하다.
1922년 구례 산성리 절골에 지어진 백경 선생의 고택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별채 등 여덟 채로 양반 상류주택의 배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사랑채에는 기둥마다 시구나 글귀를 써 판자에 새겨서 걸은 주련을 한자 한자 읽어볼 수 있다.
“일편단심은 영원하고/충효는 가문에 전하고/학문으로 국가에 보답하고/대의는 자연에 있다”는 주련을 읽다보니 왜 백경 선생이 거문고가 중심인 줄풍류의 대가(大家)이었는가를 짐작할만하고 그의 고택을 한창기 선생이 한눈에 반했는가를 알 것만 같다.
만약 백경 선생의 고택이 적산가옥이었다면 그렇게 탐냈을 것인가. 선생의 가장 큰 수집물은 일호일흡(一呼一吸), 상징(symbol)으로 말할 수 있는 음양, 즉 우리의 정신사상의 한 가지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그토록 한국적이라는 것에 철학과 사상, 문화, 예술, 언어에 이르기까지 선생은 늘 고민이 짙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택은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것이다. 숨이 완전히 잠든 것을 돌이라 하고, 반쯤 잠든 것을 식물이라 하면, 동물은 숨을 쉬고 있는 것이리라. 여기에 동물이 사람과 다른 것은 영혼을 깨우지 못한다는 것인데 영혼을 깨우고 흔들던 숨결의 고택, 수오당에 들러 답답한 이 시대의 잠을 깨울 수 있다면 날마다 찾아간들 누가 말리겠는가.
'海漵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매칼럼>한 줄의 문장에서 배우다 (0) | 2018.02.28 |
---|---|
<호매칼럼>윤동주의 서시(序詩) (0) | 2018.02.14 |
<호매칼럼>'사구시의 노래'를 다시 읽으며 (0) | 2018.01.17 |
'흙빛'을 사랑하는 사람들 (0) | 2018.01.02 |
<호매칼럼>우리의 정신온도는 적절한가 (0) | 2017.1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