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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漵 칼럼

중년의 봄나들이

중년의 봄나들이/ 정홍순 시인
2018-03-13 오전 9:32:59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여행 떠나는 설렘을 가져본지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시절,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설레던 그 때처럼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행을 했다. 순천역에서 아침 6시30분에 출발하는 포항행 무궁화열차, 부산 부전역에서 하차하여 레일투어를 하였다.


    말만 들었던 기차여행을 하게 되다니 바람이 불어 일정에 차질이 있어도 마냥 즐겁기만 하여 불평이 나질 않는다. 송도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 갈매기보다 더 높이 하늘을 오르며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을 잠시 더듬어보기도 하였다.


    삶의 진리와 자기완성의 가치를 깨우쳐준 소설의 한 장면같이 서로는 소중한 순간을 담아주며 말없이 응원해주고 있었다. 사실 일상을 탈출하여 마음을 나누며 여행한다는 호사를 누려보지 못하고 산 것이 후회되기보다는 이때를 위함이구나 싶은 생각에 즐거움은 배가 되었다.


    송도해수욕장을 바라보고 땀을 뻘뻘 흘리며 매운 점심을 먹는 것도 기분 좋은 시간이었다. 오늘 하루는 먹고 마시고 즐기며 보고 놀자는 약속된 하루이기에 맘껏 떠들며 조금은 식당예의에 벗어난 행동이었지만 군인이 군복을 입었을 때처럼 관광객에게 베풀어주는 배려가 고마운 시간이었다.


    바람통에 서서 찍은 사진을 보며 못난 모습들로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중년의 시간은 오히려 쓸쓸하지 않았다. 조금은 못나 보이고, 삐틀거리는 걸음새가 천연덕스럽게 어울리는 것은 다름 아닌 중년의 멋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인솔자는 거듭 바람을 핑계로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있었지만 우리들 중년은 스스로 잘 어울리며 놀았다. 시간도 잘 맞추고, 두 번 돌아서서 인원 파악을 하지 않아도 척척 잘 맞았다. 어찌 부산 한두 번 안 가본 사람이 있었을까. 새로운 것에 호기심이 발동할 중년이던가.


    태종대는 바람이 더욱 거칠어 유람선을 포기하고 다누비열차를 탔다. 전망대에서 생도(주전자섬)를 바라보며 격랑을 맘껏 즐기는 것 또한 일품이었다. 깎아지른 바위벽을 향해 쉴 새 없이 부딪히는 바다의 몸부림, 부서지고 또 부서지는 쪽빛바다를 눈에 넣으며 차 한 잔을 들어 꿈을 꾸기보다 반추하는 생의 시간은 곧 명상이었다.


    삶이 고달파 아니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 혹은 영원히 잔혹한 벌을 가하고 싶을 때, 수 십 질이나 되는 바다로 투신하는 사고가 빈번했다던 전망대, 1974년 모자상을 세워 이를 방지하고자 했다는 안내문이 써져있다. 그랬구나. 자살바위라 했겠구나 싶어 고단한 자식들이 떠올라 빈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불명예스런 자살국가, 청년들이 낭만을 잃어버린 국가, 연애는 있어도 결혼은 기피하는 국가, 결혼은 하여도 애 낳기 겁나는 국가, 이민가고 싶다는 국가, 그 남단 벼랑에 한 어머니는 불안한 아들과 딸을 꼭 안고 있다. 그래 죽지 마라, 죽지 말고 살아라.


    로렌 커닝햄의 ‘벼랑 끝에 서는 용기’를 함께 읽고 싶은 순간이 이런 때가 아니었을까. 다시는 청년으로 돌아설 수 없는 우리 중년들은 아쉬움을 안고 자갈치, 국제, 깡통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장으로 들어갔다. 가난했던 시대, 전쟁의 아픔과 군수물자, 피난이라는 고난의 이름으로 명명된 생명의 현장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고,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부산을 대표하는 시장, 마침 음력 정월대보름이라 풍성하기만 한 시장에서 가루우유를 맛보게 되었다. 과거 미군들이 배급했던 우유가 아니었던가. 쪄 먹고, 타 먹고 배탈 나기 일쑤였던 우유 한 봉지 사들고 돌아오는 기차를 타야 했다.


    어둠이 내린 부전역 6시44분 열차, 종착역 순천을 향해 기차는 떠난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굳세어라 금순아’) 국제시장 장사치가 그리워하는 금순이 이름을 불러보며 열차는 웃음꽃이 활짝 폈다. 아니 빵 터졌다. 급기야 안내방송으로 조용히 하라는 주의가 떨어졌다. 그래도 소용없다.


    김해 진례(進禮)역을 지나며 진례의 영문자가 Jillye로 표기한 것을 보았다. 영문자로 읽으면 질례다. 광양을 관양, 장흥을 자응이라 하는 전라도풍을 따랐을까 생각하며 그 또한 살짝 웃으며 지나올 수 있었지만 아직도 N과 L이 궁금하기만 하다.


    중년을 제2의 사추기, 인생의 위기기, 빈 둥지 증후군 등으로 말하고 있다. 2015년 유엔이 발표한 생애주기별 연령주기표에 따르면 18세에서 65세까지는 청년, 66세에서 79세까지는 중년으로 구분된다. 이제 ‘후기청년기’라고 새롭게 불리는 중년기에 ‘웃음’은 차장도 통제할 수 없는 노릇임을 알게 되었다.


    100세 시대를 시작한 중년에게는 아직도 살길이 적지 않다. 생의 편차가 있다 해도 오래 살 것은 틀림없다. 새로운 전략을 세워야한다. 일만하다 죽을 수는 없다. 남은 생은 스스로 관리해야 한다.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고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하루 쯤 나들이를 다녀오는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중년의 모든 이웃들이여, 올해는 눈 딱 감고 봄나들이 한번 다녀오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