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를 밟다>를 읽고 송준용
나는 정홍순의 시를 읽고 나서 이색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란 항용 서정시에서 보아왔던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것이었다. 나는 여기서 예시를 들어 그 근거를 제공해 보겠다.
나는 북관(北關)에 혼자 누워서 어느 아침 의원(醫員)을 뵈이었다 의원은 여래(如來)같은 상을 하고 관공(關公)의 수염을 드리워서 먼 옛적 어느 나라 신선 같은 데 새끼손톱 길게 돋은 손을 내어 묵묵하니 한참 맥을 짚더니 문득 물어 고향이 어디냐 한다
이상은 백석의 시 <고향>의 첫 부분이다. 백석은 어떠한 기교도 어떠한 덧칠도 없이 민낯 그대로 진술하고 있다. 그런데도 서정시가 지녀야 할 시적미학을 성취하고 있다.
순사 기무라(木村)가 게다 딸각거리던 달산(達山)에도 1930년대는 있었다 설 끓인 물에 덤벙덤벙 당근 발목쟁이 털 손질하려고 틀어쥔 기무라 천벌 나게 걷어차고 달음 친 수탉의 발가락 끝에 닥다글닥다글 달라붙은 세질목(三道項)이 있었다
정홍순은 <남면주재소>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도 시적미학을 위한 어떠한 기교도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부분 시적미학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을 유추해 보면 백석은 북방(평북 정주)의 언어를 정홍순은 남방(충남 태안)의 언어를 꾹꾹 눌러가면서 감칠맛 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다가 이따금 등장하고 있는 민속이나 고사(故事)들도 한 몫을 하고 있다. 이 시 외에도 많은 작품들이 그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
시대는 바야흐로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지식정보화시대를 지나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바뀌었다.이러한 변화와 변모 속에서 어찌 시만이 독야청청(獨也靑靑)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많은 유형(類型)의 시들이 여러 가지 형태의 옷을 입고 등장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문학이 지녀야할 항구성(恒久性)의 결여 때문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정홍순이 가고 있는 시적방향은 무척 긍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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