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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를 밟다

시집 해설

참말로 참말하기에 대한 경이(驚異)

 

백인덕(시인)

 

 

1.

아무도 슬퍼하지도 염려하지도 않는 일이 있다. 세상에 끔찍한 사건이야 매일 다반사지만, 그래서 우리의 존속(存續)과 번영(繁榮)과는 아주 무관해 보이는 사실이 있다. 세계가 말 그대로 세계화를 부르짖으면서 사라진 언어가 수만 개에 이른다는 것이다. 대체로 표기할 문자를 획득하지 못한 구전(口傳) 언어가 대부분이지만, 문제는 정보를 빛의 속도로 주고받게 되면서부터 표기문자를 가진 언어조차 멸종의 위험에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입말의 멸종은 단순히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말을 잃은 존재는 자기 정체성이라는 당대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과 풍습, 역사의 고리에서 끊어져 마치 벼락 맞아 생겨난 존재처럼 아예 고향이 아니라 고향에 대한 기억조차 없는 떠돌이가 될 수밖에 없다.

정홍순 시인은 거의 집념에 가까운 의지로 시적 호불호(好不好), 즉 평판 따위에는 아예 귀를 닫아버리고 오로지 그의 참말을 사랑하는 자세로 시작(詩作)을 지속한다.

 

나는 고향 말을 신봉한다

내 귀에 새겨진 이름들이

나를 느끼며 살게 하는 혼령이시다

언어가 하나이던

시날 평지는 나와 상관이 없다

내 조상의 말, 짐승들을 부르고

산천초목을 부르고 신을 부르며 사는 말이

내게는 참말이다

가령 너무 슬픈 꽃이어서

꽃의 비녀 떼고

옥잠화를 옥자마로 불러도

나는 틀린 말을 믿는 것이다

하여 철목에 묻어와 귀화한 꽃을

망초, 개망초 하지만

내 고향에서는 신나는 나물이고

소의 밥이었다

할미초 또한

안달곶 얼크러진 시퍼런 물풀을

난 풍년초로 상속받는다

꽃가마 덩실거리던 궁샘

매끌매끌 퍼렇게 자라는 풀 헤치고

두레박 차게 길러

고수레, 고수레 풍년을 빈다

나의 판수여

―「풍년초전문

 

시인은 단호하다. “나는 고향 말을 신봉한다고 명제적으로 선언한다. 무릇, 모든 명제는 일종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어야만 한다. 즉 자기 전제를 자기가 참되게 만들어야 한다. 시인은 내 귀에 새겨진 이름들이/나를 느끼며 살게 하는 혼령이라고 근거를 댄다. ‘혼령은 비사실적으로 느껴지지만 내 귀에 새겨진 이름들이기 때문에 그 어떤 논리적 귀결보다 강력하고 아름답다. ‘시날 평지’(구약에서 바빌론 탑을 쌓았다)는 세태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한 비유인데 이 또한 적절하다. 이제 언어는 표준어/지역어의 구분을 넘어 하나의 코드(code)로 집중되고 있다. 디지털이라는 화려한 기술적 날개를 달고. 하지만 시인은 이를 결단코 거부하는 자세를 드러낸다. “내 조상의 말, 짐승들을 부르고/산천초목을 부르고 신을 부르며 사는 말이/내게는 참말이다라고 오히려 신봉의 의미를 구체화한다. 누구는 여기서 언어의 원시성, 또는 작품의 끝 행에 등장하는 판수와 결합하여 시인이 샤먼적 성격을 지녔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오해조차 작품 가운데 가령이후에 예시로 사용된 옥잠화’, ‘할미꽃의 용례를 보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작품에서 주목하게 되는 부분은 마지막 행 나의 판수여라는 호격 종결인데, ‘나의라고 했으니 시인 자신일 리는 만무하고, ‘판수는 사전적 도움이 좀 필요했다(충남 지방에서만 주로 사용된다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이 글에서는 시인의 이런 일종의 기획(企劃)이 매우 정당하고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음을 시인 자신이 자각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이해하기로 한다.

시인은 참말신봉하는 자신의 시작 방향을 작품을 통해 강력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번 시집은 결국 이런 시작 태도와 방향에 따라 제작, 구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정홍순 시인이 이번 시집에 풀어놓은 여러 양태들을 어설프게나마 갈래 묶으면서 그 특질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나름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천순이만이 빠뽕(밥봉) 독수리 둥지 염탐하며

보리수 가닥치던 곰섬[熊島]에 곰은 없다

납성이 신성(申城)에 원숭이도 없다

노간이(鹿)에 사슴도 없다

바람결에 백골로 싼 사구 길바닥

할미섬, 장구섬, 밖곰섬, 불태섬, 안곰섬

하얀 모래 낯바닥에 부비며

달랑게처럼 모래성 쌓아보지 않고는

메꽃처럼 피어보지 않고는

도마뱀처럼 달음박질쳐 보지 않고는

개미귀신처럼 숨어보지 않고는

사리 때 뭍으로 오르는 곰을 볼 수 없다

질마섬[鞍馬島]의 말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시라 해도 조급하지 마라

염전에 갯물이 소금꽃이 되듯이

짐승들로 해석(海石)이 되듯이 장구섬[長鼓島]이 두

각시녀 엘레지 쳐내는 장단을 들어야 한다

―「곰섬부분

 

시인은 사실을 알고 있다. “곰섬[熊島]에 곰은 없, “신성(申城)에 원숭이도 없, “노간이(鹿)에 사슴도 없고 심지어 질마섬[鞍馬島]의 말을 볼 수도 없다. 그러나 장구섬[長鼓島]이 두/각시녀 엘레지 쳐내는 장단을 들어야 한다는 이 사실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있고 없음 같은 문제가 아니다. 또는 섬 이름, 즉 명사가 거느리게 되는 의미의 다양성도 아니다. 그것은 제 일의적 감각인 시각을 넘어서 귀(청각)가 열리기까지의 시간이다. 일종의 기다림이다. 이 기다림은 비틀어 눈을 트고 귀를 열어 해식의 노래/당신의 그늘만이 그늘에서만이/곰은 씰룩씰룩 백구지를 달릴 것이다눈을 트고 귀를여는 기다림, 그 결과로 갖게 되는 열린 마음(그늘)에서만 시인의 참말은 죽은 말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말이 된다는 것을 고지(告知)한다.

 

 

2.

사랑은 대상에 따라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 자기 의지와 목적을 갖는 유기체 생명과 부단한 의미부여를 통해 거듭 살아나는 대상을 한 가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정홍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그의 사랑의 대상이 참말’, 아니 그것을 배양하고 또 거리낌 없이 살아 숨 쉬게 하는 특정 지역임을 명시한다. 충남 태안군 일대인데(지도를 펼쳐놓고 한참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냥 사랑한다는 마음 이상으로 적절한 방식을 스스로 발명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랑은 일정한 단계를 거칠 때 소망하는바 그대로 진면목을 드러내게 될 터인데, 축약하자면 기억복원전승이 선형적일 뿐만 아니라 순환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장 바람직한 결과에 가닿게 될 것이다. 정홍순 시인은 지역적 특성을 결정하는 요소인 지형, 풍습(인문적 환경), 역사에 남다른 애착과 함께 탁월한 기억의 힘을 보여준다.

 

그전부터 마() 장사치들이 장시했다고

마근포(麻斤浦)라 부르다가 천연스레 물너울 막던

방파제라서 막음이라고 마금포라고도 했다가

도적떼들이 바다에 칼 갈아 훈련했다고

마검포라 부르는데 누가 알겠어만 흔하게

마근개로 갯바구니 들고 다녔으니

―「해당화부분

 

포구의 이름 변천사를 상세히 들려준다. ‘마근포마금포마검포마근개로 지명 하나가 변하는 이유를 깔끔하게 정리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작품으로는 세평놀이가 있는데 주석을 통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다음으로 인문적 환경과 관련해서는 해학적인 작품을 보여준다. 남면주재소는 지역에서 전해 내려오는 어허 그놈 참 목천이 닭 잡듯 허는구먼!”이라는 말의 일종의 고사(古事)를 밝힌 것인데, 의미심장하다.

 

여보오, 병아리 아부지 빨가벗고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 못 봤소?”

 

분명히 우리말을 한 것인데

기무라 앞에서 허벅지게 박장하던 그날

주재소 죽 그릇 핥은 놈은 없었다고

순사 앞에서 두 날개 펄쩍거렸던 닭과

기만의 포효를 널름 삼킨 날이 있었다

―「남면주재소부분

 

일제 강점기 일종의 이주민이었던 기무라(木村)’분명히 우리말을 한것이지만, 그는 참말을 사용할 자격과 눈이 틔고 귀가 열릴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은 어처구니없는 짓을 하는 놈이라는 뜻의 말을 남기고 지역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런 사태는 일제강점기에만 있었던 것이 아닌데, 시인이 계담, 귀가 먹다에서 그려내는 모습이 기무라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새마을운동이라는 기치 아래 농촌을 획일화하려 했던 유신정권에 대해 계담닭 쓸개를 사용해 풍자의 한 칼을 날리고 있다. 작품 중간에 동의보감내용과 유신 선포를 병렬 배치한 데서도 일종의 배치 효과가 드러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참말아닌 것, 마이크 소리에 오히려 삶이 피폐해진 상황을 적확하게 집어낼 수 있다는 점이 놀랍다. 시인의 섬세한 시선은 도리깨질오산소(吳山所)와 양골소(梁骨所)같은 작품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시인은 이제 그가 기억했던 것, 혹은 채집하고 연구했던 것들로부터 참말이 평범하게 일상을 줄 놓던 시절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은 물론 개인적으로는 가장 아픈 가족사에서 출발하는 것이 마땅하다.

 

태어날 테면

쉰 살 나이 터울로는 아버지의 자식이 되지 말고

적어도 어머니의 쉰둥이는 되지 마라

 

늦된 농사

갈아엎던 폐농 때마다 술이 늘던 아버지

종자 뒤웅박이 텅텅 빌 때마다

뿌리까지 쏟아져 이빨주머니 배불러 차던 어머니

 

천리 밖 동부꽃이 피면

동부 얹어 밥하는 어매 생각에 울지 않으랴

갯둑 이슬치는 풀이 퍼렇게 자라 오르면

깔 짐 지는 허리 굽은 아배 낫질 슬프지 않으랴

 

천륜의 강이 고비지게 넓어도 원통하고

눈물 같은 강에서는 울림 한통 서럽다 무덤 되고

 

함부로 밟지도 못하겠더라

―「노작전문

 

시인은 고향을 떠나 모어(母語)를 벗어났을 때, 고향을 회복하는 시인이 된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말을 하는 것은 언어이다, 인간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따지고 들면, 나름 다 자기 명제에 진실했을 것이므로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걱정스러운 것은 직접적으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말을 사용할 때, 그 참 가치를 훼손하려는 시도들이다. ‘참말은 시인 자신의 의지로 형성될 수 없다. 그것은 불가피하게 고향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고뇌하며 찾아낸 것이다. 너무 쉽게 자기 말은 버리는, 또는 어떤 목적에 의해 자기 정체성이 보편화하는 것을 훼손하는 이런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시인에게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복원해야 할 최초의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삶이 시작되었고, 또 그 품을 확장하면서 삶이 지속될 것이고, 그 확장과 지속이 있어야만 시인의 참말도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륜의 강이 고비지게 넓어도 원통하고/눈물 같은 강에서는 울림 한통 서럽다 무덤 되고//함부로 밟지도 못하겠더라라는 심경이 아니 시적 자세가 이번 시집의 진실성을 일정 부분 담보한다.

 

 

3.

사랑의 한 단계로 복원(restoration)을 위해서는 기록해두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이번 시집의 경우 당암포구에 들어 있는 숙부는 내포좌경굿 무형문화재*(충청남도 무형문화재 제49호 내포앉은굿 보유자 정종호 법사(2013. 12. 1. 지정)”는 말할 것도 없고, “한통 김 빈손으로 돌아온 아버지/억장이 무너져 내리지만/흙손 들고 발라 논 황토벽만은/대오리에 짱짱할 거라 선방하는 아버지에게/따뜻한 김국으로 달래는 어머니/대한 추위도 골무 하나로 기워나갔다”(누비)에 덧대인 황도붕기풍어제: 충청남도 무형문화제 제12등이 이를 반증한다.

정홍순 시인의 이번 시집은 지역장소거처로서의 고향의 의미를 새롭게 해주었다. 이미지의 편린(片鱗)이거나 서술을 완성하지 못하는 언어()로서의 고향이 아니라 살아있었고, 현재도 살아 변화하며, 그렇게 변하면서 지속하게 될 생명으로서의 고향을 되살려주었다. 살아있게 될 것이란 믿음은 일정 부분 누군가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는 상실에서 비롯한다. 시인은 이를 부모를 벗어나 판목나루묵아, 오리다리도 부러진다는 저 힘센 물살에/너의 청춘은 정말 귀가 먹었다니/소리를 뱉어라 이 망할 놈아라고 부르는 묵아’, 느르섬에 풀어진 노래의 폐병쟁이, “네가 남긴 싸구려 노랫가락 한 자투리가/비릿한 지린내로 수문들에 풀풀거리는 밤을 맛보게 하는 능교’, 입춘부고쉰둘에 쓰러진 너등을 호명하며 완성한다. 간식놀이눈깔사탕의 추억이 아련하고 따뜻하면서도 비국적인 정조를 자아내지만, 상실은 또 다른 꿈으로 대체된다. 바로 이런 속성이 시의 비정성일지도 모른다.

정홍순 시인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상실에의 자각이 전승을 꿈꾸게 한다. 전승이란 있는 그대로를 물려주는 기계적 인계(引繼)가 아니다. 자기가 발견한 의미와 후대에 나름의 의미로 생장할 가능성을 함께 공유하면서 건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거처를 특정한 장소로 규정하는 시각이다. 물론 거처란 장소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소수의 인원이 생활을 함께하는 곳으로 지시될 수 있지만 이 지시적 의미를 벗어나면 거처는 모여 정체성이 확립되고, 확인되는 모든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즉 나를 그곳의 나’, 나아가 그곳의 너’, 결국 그곳의 우리로 만드는 모든 지점은 장소가 아니라 거처라는 것이다. 시인은 이를 농로를 통해 보여준다.

 

구들장 빼내 무너진 농로

석축으로 썼다는 말이

고향 누가 죽었다는 말만큼이나

아픈 부고다

아버지 환도에 핀 구들의 꽃

식어버린 방고래

난방 평수가 계산이 된다

바람에 문질러 늙은

돌배나무가 피운

꽃의 무게가 그러하듯이

아버지가 놓은 구들의 연식이 짚어진다

구들장 져 나르던 길바닥

드르니 애들이 책 보따리 메고

모락모락 다녔다

발바닥에 돌독 피어

절름절름 울어 배운 공부

불더미에도 주저앉지 않고 훈훈할

친구들의 안부가 사르르 고프다

―「구들장전문

 

그렇지 않은가, 참말이 아무 위계나 경계 없이 열린 마음에 들고나는 곳은 참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거기는 구들장을 빼내 무너진 농로/석축으로쓴 어이없는 당신이 있었던 곳이고, 그랬기에 드르니 애들이 책 보따리 메고/모락모락 다닐 수 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시인의 눈엔 바람에 문질러 늙은/돌배나무가 피운/꽃의 무게가 그러하듯이아버지가 구들장을 빼놓은 농로의 무게가 같다. 그래서 이제 내가 불더미에도 주저앉지않고 친구들과 함께 걸어갈 길이 놓인 것이다. 정홍순 시인의 시작(詩作) 방향은 바로 그 구들장에서 비롯되었음을, 이 시집을 읽은 이라면 아마 눈치챘을 것이다. 지난한 그의 시작(詩作)과 그의 참말에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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