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海漵 칼럼

정유년 강씨녀의 부엌칼

정유년 강씨녀의 부엌칼/ 정홍순 시인
2017-02-28 오전 10:19:55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이 발발한지 칠 주갑이 되는 해이다. 일 주갑을 육십년으로 하니 420년이 된다. 일본이 전라도를 전몰시키기 위해 재침략한 정유재란으로 전라도지역은 초토화되었다.


    늑탈의 광란이 벌어진 참상 속에서 이충무공은 한 사람도 살려서 돌려보낼 수 없다고 외치며 칼을 뽑아들었고, 아녀자인 강씨녀는 의분의 부엌칼을 뽑아들었다. 풍전등화 같은 조선의 운명 앞에서 이처럼 민중들이 바친 숭고한 넋으로 나라를 지켜냈다.


    정유재란의 역사는 역사로 재해석되고 있지만, 무명의 한을 다 담아낼 수 없는 것이 후손의 수치로 남아 있다. 전란의 마지막 격전지 왜교성 전투가 벌어진 우리지역 해룡면에서 수탈을 견디다 못해 부엌칼을 뽑아들은 강씨녀의 일화는 조현범 선생의 《강남악부》로 통해 전해지고 있다.


    조현범 선생이 나이 69세 때(1784, 정조 8) 순천지방의 인물, 기사(奇事), 풍속, 지리 등 사적(事蹟)을 모아 《강남악부》를 편찬하였는데 선생은 이수광이 편찬한 순천읍지인 《승평지》를 읽고 현재일과 감추어진 일을 더해《해동악부》체를 따라 편찬하였음을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조현범 선생의 깊은 역사관을 통하여 선조시대 즉, 정유재란 당시의 정황 중 일부를 시를 통하여 접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책의 이름이 ‘악부(樂府)’지만 한 고을의 역사서이고, 풍속지이며, 유사고(遺事考)로서 선인들의 사적을 배우고 잇게 하였다고 병자년(1936) 민병승이 다시 서문에 적고 있다.


    정유년 민간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묻지 않는 역사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경》삼백 수도 민간 속에서 나온 것인 만큼 평범한 사내와 아낙들이 밝히 말하여 적은 시를 통하여 교화할 수 있는 것은 필연이라고 조현범 선생은 말하고 있다. 가르쳐 바르게 세우고자하는 선생의 작품‘강씨녀(姜氏女)’ 속으로 들어가 보자.


    ‘강씨녀(姜氏女)’는 《강남악부》40번째 시이다. 작품해설에 “강씨는 누구의 딸인지 모른다. 정유년에 용두(龍頭)와 해촌(海村)(용두와 해촌이 지금은 해룡이다. 필자 주) 사이에 주둔해 있으면서 농사를 권하고 여항에서 세금을 거두어 갔다. 왜적 한 명이 강씨 집에 찾아와 세금을 내라고 협박하였다. 강씨는 왜놈이 남의 나라에 쳐들어와 협박하면서 세금을 거두는 것에 분기가 일어나, 이내 그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 먼저 술을 주어 먹이고,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하고서 부엌에 들어가 식칼을 갈아 두었다가, 왜적이 취해 쓰러질 것을 기다려 찔러 죽였다.”고 논개 버금가는 아낙의 행동을 기리고 있다.


    “강씨녀여,/여인네가 왜적 때문에 나라가 위태로운 때를 만났네./강씨의 칼이여,/항아리 가에 칼을 가는 것은 쓸 데가 있어서라네./적의 머리를 베어서 나라의 수치를 씻었으니/한 여자가 백 명의 군사보다 낫구나./강씨에게 죄인 될 이가 당시에 많았으니,/그대는 보지 못했나,/장군들이 분분히 성을 버리고 도망가던 것을.”(‘강씨녀’ 전문)


    420년 만에 다시 맞는 정유년, 정유년은 난리의 해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는 청산을 위한 해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에서 재침략전쟁을 끝으로 이 땅에서 왜적을 몰아냈다. 지금 이 땅은 최순실 국정농단에 빠져 나라 안팎으로 난리를 치르고 있다. 정유재란은 왜적과의 싸움이었지만, 국정농단은 유신의 잔존세력과의 싸움이다.


    외부의 힘, 내부의 힘과 싸워야하는 정유년의 난리는 결국 통치부재라는 공통점을 안고 있다. 나라와 백성을 보는 어진 마음이 없는 패도정치,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새벽을 오게 하려는 수구세력들이 아직도 잔존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가 아니어도 상관없는 타고난 운명을 호도하는 세력들이 정점에 다다라 있는 참혹한 현실에 우리는 지금 촛불을 들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정유년에 강씨녀는 부엌칼을 들고 왜적의 머리를 베어냈는데 반해, 칠 주갑으로 맞는 올해 우리는 최순실 일당을 통해 허세의 칼, 거짓의 칼, 망국의 칼을 휘두르는 미천한 짓을 보고 있다. 아니 종자가 다른 면모를 보고 있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어떻게 저런 종자들에게 이 땅이 생명을 내주었는지 비통하기만 하다. 비선에 옹호하고, 비선의 수를 가지고 칼춤 추는 역적들에 대항하여 황망히 다투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


    민주주의는 민간 속에서 생존하는 것이다. 시대를 이겨내지 못하면 다음 세대는 죽는다. 얼었던 땅을 뚫고 움을 밀어내는 장엄한 새싹들처럼 민주주의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이충무공의 칼이 있고, 해룡에서 뽑아들은 강씨녀의 칼이 있다. 지독한 생명의 명령을 받은 지금 우리는 백 명의 군사보다 낫고, 도망치는 장군들보다 나은 강씨녀의 부엌칼을 품고 새 역사를 받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