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연꽃 강의실을 위하여
정홍순/시인 |
2016년 06월 20일(월) 19: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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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도민일보]소로 농사짓던 시절에는 소를 몰고 가다보면 소가 입에 닿는 대로 농작물을 뜯어먹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입에 망을 씌워 다니지만 소가 한입 훑어먹은 것을 두고 입 아프게 싸우지는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서로 미안해하며 넘어가는 것이 시골인심이었다.
하지만 이도 옛말이다. 소를 앞세우고 논이나 밭둑 지나가는 풍경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농작물 값을 적잖이 물어주어야 할 인심사난 세상이 된 것이다. 전에는 으레 소를 식구처럼 대하였는데 소가 말만 못하지 농사를 함께 짓는 상일꾼이었던 것이다.
소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보명의 목우도(牧牛圖)가 생각난다. 목우도는 사람이 욕망의 오염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10폭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십우도(十牛圖)로 점수돈오(漸修頓悟)의 수행을 보여주는 선화(禪畵)이다.
10폭 선화 가운데 목동은 즐겁게 태평가를 부르고 소는 꼬리만 제외하고 온통 희어진 욕망의 오염이 거의 사라지고, 나와 소가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의 장면에서 한 폭의 가르침은 선종의 불자가 아니더라도 점차로 도를 얻어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막히거나 거칠 것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말이 수행의 언어라면, 너무나 넓고 멀어서 끝이 없다는 무애(無涯)라는 말은 학문의 언어라고 하면 억측일까. ‘당신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라’고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말한 것처럼 지식과 경험은 끝이 없다는 지험무애(知驗無涯)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장자 또한 ‘나의 생은 끝이 있으나 지식은 끝이 없다’고 하였다. 하여 길을 간다는 말이 도를 닦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공부에 끝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를 담고, 만학도의 길을 나서는 이들이 야간에 강의실을 찾는 것을 보면 숭고하기까지 하다. 만학의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단순히 자격증 혹은 졸업장을 취득하기 위해서 고된 학문에 열중하는 것은 아니라 본다.
이렇듯 인생을 배우고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하여 밤마다 자신의 굳은 머리를 쪼아대는 절차탁마의 수행이 한 강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연배를 떠나 동급생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말이다. 그러니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한솥밥을 같이 나누며 대학(大學)을 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함인가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야간학도들은 마치 빅토리아 연꽃을 닮았다. 빅토리아 연꽃은 밤에만 피는 꽃이다. 첫날은 하얀 꽃을 새벽녘에 피었다가 이튿날부터 붉은색으로 밤이면 이슬을 머금으면서 밤에만 피는 꽃으로 밤의 야화라 부르고 있다. 한 여름에 피는 빅토리아처럼 피어날 연못 같은 강의실에서는 아름다운 풍경이 밤이 깊을수록 향기롭기만 하다.
이제 종강을 하고 곧 긴 여름방학에 들어갈 것이다. 무엇이든지 시작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마칠 때가 되면 아쉬운 일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사람이 하는 일이려니 해도 또한 사람이 고쳐나갈 수 있는 일이겠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관계의 중요성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존중하는 마음과 배려가 없는 강의실은 학원만도 못한 것이다. 이기심만 가득해서 공부에 임한들 이기적인 사람만 되고 말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중요성은 발견하는 데 있지 않는가. 시간 때우기 식이거나,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동하는 처사들은 자율의 미가 결여된 대학생활이다. 사람과 시간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도 있어야하고, 점점 깨달아가는 향상성이 있어야하며, 끝이 없는 길에는 한걸음 한걸음씩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제 피어날 밤의 연꽃처럼 거짓 없는 인격으로 나 뿐만 아니라 남도 이롭게 만들 수 있는 야간학도의 정신이 되살아나리라 생각하며 하늘의 별을 세어본다.
하지만 이도 옛말이다. 소를 앞세우고 논이나 밭둑 지나가는 풍경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농작물 값을 적잖이 물어주어야 할 인심사난 세상이 된 것이다. 전에는 으레 소를 식구처럼 대하였는데 소가 말만 못하지 농사를 함께 짓는 상일꾼이었던 것이다.
소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보명의 목우도(牧牛圖)가 생각난다. 목우도는 사람이 욕망의 오염에서 벗어나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10폭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최초의 십우도(十牛圖)로 점수돈오(漸修頓悟)의 수행을 보여주는 선화(禪畵)이다.
10폭 선화 가운데 목동은 즐겁게 태평가를 부르고 소는 꼬리만 제외하고 온통 희어진 욕망의 오염이 거의 사라지고, 나와 소가 걸림이 없다는 무애(無碍)의 장면에서 한 폭의 가르침은 선종의 불자가 아니더라도 점차로 도를 얻어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막히거나 거칠 것이 없다는 무애(無碍)라는 말이 수행의 언어라면, 너무나 넓고 멀어서 끝이 없다는 무애(無涯)라는 말은 학문의 언어라고 하면 억측일까. ‘당신의 인식의 지평을 확장하라’고 철학자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말한 것처럼 지식과 경험은 끝이 없다는 지험무애(知驗無涯)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장자 또한 ‘나의 생은 끝이 있으나 지식은 끝이 없다’고 하였다. 하여 길을 간다는 말이 도를 닦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공부에 끝을 두어서는 아니 된다는 의미를 담고, 만학도의 길을 나서는 이들이 야간에 강의실을 찾는 것을 보면 숭고하기까지 하다. 만학의 이유가 다양하겠지만 단순히 자격증 혹은 졸업장을 취득하기 위해서 고된 학문에 열중하는 것은 아니라 본다.
이렇듯 인생을 배우고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위하여 밤마다 자신의 굳은 머리를 쪼아대는 절차탁마의 수행이 한 강의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연배를 떠나 동급생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고 말이다. 그러니 20대부터 60대에 이르기까지 한솥밥을 같이 나누며 대학(大學)을 하려고 모여든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하는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함인가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야간학도들은 마치 빅토리아 연꽃을 닮았다. 빅토리아 연꽃은 밤에만 피는 꽃이다. 첫날은 하얀 꽃을 새벽녘에 피었다가 이튿날부터 붉은색으로 밤이면 이슬을 머금으면서 밤에만 피는 꽃으로 밤의 야화라 부르고 있다. 한 여름에 피는 빅토리아처럼 피어날 연못 같은 강의실에서는 아름다운 풍경이 밤이 깊을수록 향기롭기만 하다.
이제 종강을 하고 곧 긴 여름방학에 들어갈 것이다. 무엇이든지 시작할 때는 보이지 않던 것이 마칠 때가 되면 아쉬운 일이 많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보다. 사람이 하는 일이려니 해도 또한 사람이 고쳐나갈 수 있는 일이겠다. 무엇보다도 아쉬운 것은 관계의 중요성을 망각한다는 것이다. 존중하는 마음과 배려가 없는 강의실은 학원만도 못한 것이다. 이기심만 가득해서 공부에 임한들 이기적인 사람만 되고 말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중요성은 발견하는 데 있지 않는가. 시간 때우기 식이거나,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소견에 옳은 대로만 행동하는 처사들은 자율의 미가 결여된 대학생활이다. 사람과 시간을 너무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그러려니 하는 마음도 있어야하고, 점점 깨달아가는 향상성이 있어야하며, 끝이 없는 길에는 한걸음 한걸음씩 기본적인 원칙이 있다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제 피어날 밤의 연꽃처럼 거짓 없는 인격으로 나 뿐만 아니라 남도 이롭게 만들 수 있는 야간학도의 정신이 되살아나리라 생각하며 하늘의 별을 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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