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삼보일배와 석고대죄
정홍순 /순천 희락교회목사·시인 |
2016년 02월 17일(수) 1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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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전남도민일보] 지난 해 12월에는 지인들과 ‘문화상자’에서 다큐 영화‘나쁜 나라’시사회에 참석해 두 시간여 동안 아픈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범 투쟁 1년의 기록을 보면서 너무 가슴 아픈 장면이 해가 바뀌어도 잊히지 않고 있다.
정말 대한민국은 아픈 나라, 나쁜 나라이구나. 또한 전라도는 아픈 역사를 낳는 어머니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 두 명이 시작하여 1500리길 30만 번의 삼보일배(三步一拜)로 광화문 광장에 입성하는 순례단을 보는 것은 차마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승현이 아빠 이호진 씨와 누나 이아름 양이 출발한 팽목항의 노란 물결이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나갈 때 장하다는 말보다 고름덩어리가 터지는 것과 같았다.
간혹 전라도사람을 갯땅쇠라고 부르곤 한다. 이는 비하하는 말로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데 실은 갯땅을 막아서 농사짓는 농투성이의 억척스러운 정신을 와전했을 뿐이다. 간척사업을 통해 농사를 짓고 염전을 만들어 가난한 짐을 벗어버리려던 조상들의 처절한 삶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만금을 막아 바다를 잃어버렸을 때 엎드려 걸었던 삼보일배를 한겨레신문은‘시민사회의 전설이요 신화이다’하였다.(2004년 6월 1일자)
전북의 새만금 갯벌에서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800리길을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김경일 원불교 교무, 이희운 목사가 종파를 초월해 함께한‘새만금 삼보일배’는 하나의 운동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나 두 배의 길을 삼보일배하여 다시 광화문으로 향한 이 전라도의 한을 무엇으로 다 말해야 하는가.
차라리 꽃이 북상하였다고나 해야만 하는가. “꽃상여 메고 이양역 지나/산에 오른다/보성역 떠난 기차가/금세 이양역 들러 가느라/공동산 아래 마을밖에는/절룩이며 돌아가는 완행이 숨차다/서로는 말없이 기대고/봄비가 온다/춘양쯤 울며 가는 기적소리/오늘은 이별한 게 없다/그가 떠난 철길 따라/꽃이 붉게 북상하는 중이다”(졸시, 「봄비」전문)
삼보일배의 한 서린 땅에 ‘나쁜 나라’시사회와 비슷한 무렵부터 ‘석고대죄’의 현장을 순천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맞닥뜨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섬뜩했었다. 대체 누가 눈, 비를 맞으며 저렇게 고행하고 있을까 눈 여겨 보았다.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인 만큼 1인 시위도 할 수 있고 석고대죄도 할 수 있어 하면서 말이다.
석고대죄(席藁待罪)는 거적을 깔고 엎드려 벌(罰)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행위의 표현이 아니던가. 시민을 향하여 그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고 벌주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기억을 더듬어 그의 행적 중 생각해 내는 사람들은 입을 닫아버리고 만다. 말이 아까운 것이다. 몇 해 전 그의 변을 듣기 위해서 한 식당에 간적이 있다. 두 시간여 동안 엄청난 해명을 들었다. 찬 녹차 물에 식은 밥과 조기대가리를 씹고 나오며 차라리 ‘잘못했습니다.’한마디면 될 것을 이구동성으로 하던 말이 생각난다.
한 개인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러나 다시 시민 앞에서 보인 그의 행보가 연민의 정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어려운 정치를 시민들에게는 생활로, 어려운 시민들의 생활을 정치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정치인이다. 이말 한마디만 하고 싶다.
삼보일배와 석고대죄는 처절한 일이다. 운동방식과 정치적 표방이 아니라 참 길을 수행하는 순수한 예전과 진정한 용서의 의식이었으면 싶다. 이제 더 이상 아픈 나라, 나쁜 나라가 아니었으면 싶다.
정말 대한민국은 아픈 나라, 나쁜 나라이구나. 또한 전라도는 아픈 역사를 낳는 어머니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개인 두 명이 시작하여 1500리길 30만 번의 삼보일배(三步一拜)로 광화문 광장에 입성하는 순례단을 보는 것은 차마 눈을 감고 싶을 정도였다. 승현이 아빠 이호진 씨와 누나 이아름 양이 출발한 팽목항의 노란 물결이 이순신 장군 동상 앞으로 나갈 때 장하다는 말보다 고름덩어리가 터지는 것과 같았다.
간혹 전라도사람을 갯땅쇠라고 부르곤 한다. 이는 비하하는 말로 쓰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데 실은 갯땅을 막아서 농사짓는 농투성이의 억척스러운 정신을 와전했을 뿐이다. 간척사업을 통해 농사를 짓고 염전을 만들어 가난한 짐을 벗어버리려던 조상들의 처절한 삶이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새만금을 막아 바다를 잃어버렸을 때 엎드려 걸었던 삼보일배를 한겨레신문은‘시민사회의 전설이요 신화이다’하였다.(2004년 6월 1일자)
전북의 새만금 갯벌에서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800리길을 문규현 신부, 수경 스님, 김경일 원불교 교무, 이희운 목사가 종파를 초월해 함께한‘새만금 삼보일배’는 하나의 운동방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 사실이나 두 배의 길을 삼보일배하여 다시 광화문으로 향한 이 전라도의 한을 무엇으로 다 말해야 하는가.
차라리 꽃이 북상하였다고나 해야만 하는가. “꽃상여 메고 이양역 지나/산에 오른다/보성역 떠난 기차가/금세 이양역 들러 가느라/공동산 아래 마을밖에는/절룩이며 돌아가는 완행이 숨차다/서로는 말없이 기대고/봄비가 온다/춘양쯤 울며 가는 기적소리/오늘은 이별한 게 없다/그가 떠난 철길 따라/꽃이 붉게 북상하는 중이다”(졸시, 「봄비」전문)
삼보일배의 한 서린 땅에 ‘나쁜 나라’시사회와 비슷한 무렵부터 ‘석고대죄’의 현장을 순천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맞닥뜨렸을 것이다. 처음에는 섬뜩했었다. 대체 누가 눈, 비를 맞으며 저렇게 고행하고 있을까 눈 여겨 보았다. 의사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인 만큼 1인 시위도 할 수 있고 석고대죄도 할 수 있어 하면서 말이다.
석고대죄(席藁待罪)는 거적을 깔고 엎드려 벌(罰)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행위의 표현이 아니던가. 시민을 향하여 그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고 벌주기를 기다린다는 말인가. 기억을 더듬어 그의 행적 중 생각해 내는 사람들은 입을 닫아버리고 만다. 말이 아까운 것이다. 몇 해 전 그의 변을 듣기 위해서 한 식당에 간적이 있다. 두 시간여 동안 엄청난 해명을 들었다. 찬 녹차 물에 식은 밥과 조기대가리를 씹고 나오며 차라리 ‘잘못했습니다.’한마디면 될 것을 이구동성으로 하던 말이 생각난다.
한 개인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그러나 다시 시민 앞에서 보인 그의 행보가 연민의 정으로만 다가올 뿐이다.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 어려운 정치를 시민들에게는 생활로, 어려운 시민들의 생활을 정치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정치인이다. 이말 한마디만 하고 싶다.
삼보일배와 석고대죄는 처절한 일이다. 운동방식과 정치적 표방이 아니라 참 길을 수행하는 순수한 예전과 진정한 용서의 의식이었으면 싶다. 이제 더 이상 아픈 나라, 나쁜 나라가 아니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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