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방주 예배공동체’에 대하여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
2019년 02월 13일(수)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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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에서 물고기 사냥하는 고양이를 보았다. 수질정화를 위해 가끔씩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물을 빼내는 해룡천에서 붕어 한 마리를 낚아채가는 고양이를 본 것이다.
반려동물을 데리고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된 해룡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슥한 밤 고양이가 주인으로부터 버려지는 장소가 된 해룡천은 해마다 동물영화제를 치르는 순천만국가정원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하천이다.
버려진 고양이들이 하천에서 사냥하며 살든지, 인근 마을로 들어와 한해가 다르게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으로 생태도시로서의 무색함과 역기능적인 시민의식 면모가 민낯으로 드러나고 있다. 분명 방생은 아니었을 터 필자도 세 마리의 고양이를 화단에 묻어주었다.
개나 고양이가 잘못이 아니다. 개나 고양이는 인간의 거처에 들어와 살 수 있는 생존전략에서 길러지고 길들여진 동물로써 지금은 가축으로 분류하는가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보호단체(‘순천시유기동물보호소’를 포함해서)들의 비양심적인 행태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원금과 국가보조금을 횡령하거나 부도덕한 성추행에 이르는 갖가지 추한 일들을 행하는 반인륜적 단체나 사업장이 있는가하면, 수행 정진에 매진해야 할 종교인들이 버려진 반려동물들 거두고 돌보느라 땀 흘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의 두 얼굴을 보는 듯해 씁쓸하기 만하다.
본질이 전도되는 인간 행위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서 동물이 인간의 배필이 될 수는 없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물은 영혼을 깨우지 못하고 산다. 그것이 동물이다. 개나 고양이가 인간 가까이 동거하며 산다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짐승(베헤마), 가축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반려동물에 대한 의료, 미용, 복지뿐만 아니라 사후의 문제가 종교적 입장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반려동물에게 축복기도, 장례식 추모기도 해도 되나’하는 동물신학 논쟁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동물에게서도 공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매일 마주하고 교감을 나누는 반려동물에게 가족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신앙적 차원에서 반려동물의 탄생과 죽음을 함께 하고 싶은 신앙인들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동물들과도 신의 축복을 공유할 수 있다고 보는 예배공동체가 있다. 대한성공회 송산교회 신부 민숙희씨는 2016년 이후 ‘노아의 방주 예배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는 1년에 두 번 반려동물을 축복하는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민 신부는 “노아의 방주에 사람뿐 아니라 세상의 온갖 동물들을 태웠는지를 고민하면 교회 안 동물권 논쟁 해결은 어렵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시각은 동물을 객체로 보지 말고 주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사람보다 가볍게 보지 말라는 주장이다.
성찬과 예배가 짐승(동물)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비약이다.
노아방주는 멸종위기에서 모든 생물의 보존을 지키도록 허락한 창조보존질서 행동이다. 원시종교행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어려운 광경이 동물과 함께 나누는 성찬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짐승을 신으로 섬기는 미개한 종교의식은 있을지 몰라도 본래의 성찬과 예배의 성격에서 벗어난 현실타협적인 종교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성찬과 예배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교감이나 감정에 기인하는 동물적인 관계에 허락한 것이 아니다.
정신 차리고 신에게 나아가는 거룩한 행위, 참사람 됨의 은총과 감사가 예배의 주목적인 것이며 거룩한 신과의 만남의 사건을 이루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물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을 관리하고 돌볼 의무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임은 분명하다.
동물이 멸종하면 인간 또한 멸종한다. 그러나 성찬과 예배는 죄에 대한 인간의 문제다. 영혼을 깨우지 못하는 동물(짐승)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기호에 맞게 제공되는 것이 종교의식이 아니다. 만약 사람과 같이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종교의식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일 뿐이다.
신은 이 땅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신다. 황무한 곳에 사람이 살게 하시고, 짐승이 번성하게 하신다. 이를 축복의 땅이라 한다.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인간의 책임이 성찬과 예배의 주체로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탐욕이 동물의 생존을 빼앗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다.
케어사태는 인간의 탐욕이다. 이 탐욕의 주체인 인간들이 죄를 고백하며 성찬을 더럽히지 말고 살아야 할 일이다.
반려동물을 데리고 많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된 해룡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고양이들이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슥한 밤 고양이가 주인으로부터 버려지는 장소가 된 해룡천은 해마다 동물영화제를 치르는 순천만국가정원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하천이다.
버려진 고양이들이 하천에서 사냥하며 살든지, 인근 마을로 들어와 한해가 다르게 개체수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으로 생태도시로서의 무색함과 역기능적인 시민의식 면모가 민낯으로 드러나고 있다. 분명 방생은 아니었을 터 필자도 세 마리의 고양이를 화단에 묻어주었다.
개나 고양이가 잘못이 아니다. 개나 고양이는 인간의 거처에 들어와 살 수 있는 생존전략에서 길러지고 길들여진 동물로써 지금은 가축으로 분류하는가에 대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이 보호단체(‘순천시유기동물보호소’를 포함해서)들의 비양심적인 행태로 인하여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후원금과 국가보조금을 횡령하거나 부도덕한 성추행에 이르는 갖가지 추한 일들을 행하는 반인륜적 단체나 사업장이 있는가하면, 수행 정진에 매진해야 할 종교인들이 버려진 반려동물들 거두고 돌보느라 땀 흘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인간의 두 얼굴을 보는 듯해 씁쓸하기 만하다.
본질이 전도되는 인간 행위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에서 동물이 인간의 배필이 될 수는 없다.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동물은 영혼을 깨우지 못하고 산다. 그것이 동물이다. 개나 고양이가 인간 가까이 동거하며 산다할지라도 분명한 것은 짐승(베헤마), 가축이라는 사실이다.
최근 반려동물에 대한 의료, 미용, 복지뿐만 아니라 사후의 문제가 종교적 입장에서 문제시되고 있다. ‘반려동물에게 축복기도, 장례식 추모기도 해도 되나’하는 동물신학 논쟁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을 동물에게서도 공유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매일 마주하고 교감을 나누는 반려동물에게 가족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신앙적 차원에서 반려동물의 탄생과 죽음을 함께 하고 싶은 신앙인들은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동물들과도 신의 축복을 공유할 수 있다고 보는 예배공동체가 있다. 대한성공회 송산교회 신부 민숙희씨는 2016년 이후 ‘노아의 방주 예배공동체’를 시작하였다. 이 공동체는 1년에 두 번 반려동물을 축복하는 성찬식을 거행하고 있다.
민 신부는 “노아의 방주에 사람뿐 아니라 세상의 온갖 동물들을 태웠는지를 고민하면 교회 안 동물권 논쟁 해결은 어렵지 않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시각은 동물을 객체로 보지 말고 주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사람보다 가볍게 보지 말라는 주장이다.
성찬과 예배가 짐승(동물)에게도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대단한 비약이다.
노아방주는 멸종위기에서 모든 생물의 보존을 지키도록 허락한 창조보존질서 행동이다. 원시종교행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어려운 광경이 동물과 함께 나누는 성찬과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차라리 짐승을 신으로 섬기는 미개한 종교의식은 있을지 몰라도 본래의 성찬과 예배의 성격에서 벗어난 현실타협적인 종교행위는 바람직하지 않다. 성찬과 예배는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교감이나 감정에 기인하는 동물적인 관계에 허락한 것이 아니다.
정신 차리고 신에게 나아가는 거룩한 행위, 참사람 됨의 은총과 감사가 예배의 주목적인 것이며 거룩한 신과의 만남의 사건을 이루는 것이 예배의 본질이다.
물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을 관리하고 돌볼 의무 또한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임은 분명하다.
동물이 멸종하면 인간 또한 멸종한다. 그러나 성찬과 예배는 죄에 대한 인간의 문제다. 영혼을 깨우지 못하는 동물(짐승)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의 기호에 맞게 제공되는 것이 종교의식이 아니다. 만약 사람과 같이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종교의식이 행해진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일 뿐이다.
신은 이 땅에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뿌리신다. 황무한 곳에 사람이 살게 하시고, 짐승이 번성하게 하신다. 이를 축복의 땅이라 한다.
동물의 이름을 지어주는 인간의 책임이 성찬과 예배의 주체로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탐욕이 동물의 생존을 빼앗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신앙생활이다.
케어사태는 인간의 탐욕이다. 이 탐욕의 주체인 인간들이 죄를 고백하며 성찬을 더럽히지 말고 살아야 할 일이다.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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