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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漵 칼럼

돌에서 배우다

 
[외부칼럼] 돌에서 배우다

정홍순 / 순천 희락교회목사·시인

2016년 03월 23일(수) 18:56
정홍순 순천 희락교회목사·시인
[전남도민일보]잔가지가 가지런히 전정 된 감나무에 해풍이 건들건들 부는 순천만, 개펄이 자르르 윤기 나는 오후 P교수네 안마당에는 마지막 굴을 굽느라 나무난로가 달아올랐다. 진달래 피기 전 굴 먹을 요량으로 석화를 구어내고 있는 것이다.

일상의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정을 나누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모르고 흥에 취해 있을 때 우정의 정표로 받았다는 수석 한 점에 모두의 마음이 가 닿았다. 태화강에서 데려온 흑석을 두고 해박한 이해를 도와 감탄을 자아내게 한 K시인의 수석연재담은 특별한 별미였다.

어쩐지 돌에 핀 꽃을 따 굽고 돌이 품고 있는 기품에 반해 흑석 같은 밤이 빛나는 돌의 날 박두진 시인의 수석연가 한 수가 생각났다.

“돌밭의//돌들이 날더러 비겁하다고 한다./돌들이 날더러 어리석다고 한다./돌들이 날더러 실망했다고 한다.//돌들이 날더러 눈물 흘리라고 한다./돌들이 날더러 피 흘리라고 한다.//중략//이때 천천만 돌들의//그 돌 속의 불, 돌 속의 물, 돌 속의 빛, 돌 속의 얼음, 돌 속의 시, 돌 속의 꿈, 돌 속의 고독, 돌 속의 눈물, 돌 속의 참음, 돌 속의 힘, 돌 속의 저항”(박두진, ‘수석 회의록’부분)

현장에서 돌을 배운 멋진 시간이었다. 학교교육이 융합교육으로 새로 거듭나는 이때 우리들은 풍성한 산교육을 밤 깊도록 걱정하며 나누었다.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시험 단계에 있을지라도 입시교육을 탈피하려는 참교육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 뿐만 아니라 정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국어가 있어 수학을 하고 수학이 있어 역사와 철학을 이야기하며 연계하는 공부가 정말 인간다운 교육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세돌이 알파고와 세기의 대국을 펼쳤다. 그는 졌다. 진 것이 인간의 실패가 아니라 돌의 가르침을 통해 인간을 세운 것이다. 인공이란 것은 실패를 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원치 않는 것은 생명체가 아닌 것이다.

일찍이 과학 칼럼리스트 케빈 켈리는 ‘통제 불능’을 말하면서 예견이라도 하듯 “성서에 따르면 태초 인간을 창조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를테면 낙원 추방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신이 돼 기계를 창조했다. 하지만 자신이 만든 창조물이 어느 날 지배 밖에 있음을 문득 깨달아야 했다. 신이 그랬듯 인간도 싫든 좋든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통제 불능이다”라고 하였다.

20세기는 물리학의 시대라면 21세기는 생물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그의 견해에 따라 ‘만들어진 것’과 ‘태어난 것’의 결합복잡과학성의 현주소를 우리는 살게 된 것이다. 즉, 자율적이며 창조적인 통제를 할 수 없는 세계의 탄생이 통제 불능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에게는 무한한 인성과 영성이 있다. 생로병사로 존재하는 인간, 의사 양창모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실수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인간의 진보는 시작되고, 무결점의 인간보다 실패로부터 겸손을 배워나가는 인간이 훨씬 이 세상에 민폐를 덜 끼친다는 말이 타당하다.

통제 불능의 시대에 우리는 철저히 자본주의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인공지능과 같은 새로운 생물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생물체를 운용하게 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느 것에도 이미 자본주의를 통제할 기능이 마비된 상태이다.

정치, 종교,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자본주의 토대 위에 세워진 현실 한 복판에서 이세돌은 대국을 치렀고, 우리들은 이겨주기를 응원하였다. 하지만 자본의 게임을 인간은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받았다. 이제 돌을 다시 들어 복기하듯 “돌과 돌이 끌어안고 엉이엉이 운다”고 돌을 노래한 시인의 눈물을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