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가 삶이라면 나는 시를 버릴 생각이라고 시 쓰는 K형에게 말한 적이 있다. 고매한 예술에 삶이 매몰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차라리 버리고 사는 것이 인간다움이 아니겠느냐고 투정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삶이 어떠하든 읽는 이야 작품을 만나서 공감을 하던지 아니다 싶으면 외면하면 그만일 것이다. 하지만 어디 사람 사는 일이 그리 간단하던가! 차라리 작품만 알고 지냈더라면 하는 후회스러운 일이 종종 있기에 나는 K형에게 진정성이 무엇이냐고 되물었던 것이다.
창작이 지어내는 것, 주관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지만 작품 속에 숨어 있는 사사로운 시인의 삶이 볼썽사나움으로 비쳐질 때 그의 작품이 허구의 한 맥락으로서 감동을 떨어뜨리고 그의 시가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다 할지라도 속았다는 말밖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다.
문학의 윤리 즉, 문학은 비윤리적으로 보편적 도덕률에 대한 저항이라 말하는 하재봉의 견해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로고스가 아니라 파토스(열정)로 한 시대의 정신을 추동해 내는 거대한 힘이라고 한 서영채의 견해에서 나는 문학하기의 사생활이 다만 문학의 도구일 뿐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문학의 배반은 수 없이 널려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생명과 글을 소중하게 보듬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 김준태의 ‘생명주의’에서 생명적이라 할 때 농약을 먹고 자살한 시인 김만옥을 문학의 배반자라 하였는데 지독한 가난에 내몰리던 천재 시인 김만옥은 못할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시인 김만옥이 남긴 시들을 읽으면(유고시집『오늘 죽지 않고 오늘 살아 있다』) 심미적이고 빛나는 그의 시가 나를 슬프게 한다.
Ⅰ
막 잠을 깬 눈으로 처녀들이
창가에 얼굴을 내밀 듯이 펴 오르는
薔薇.
그리고 무릎의 아래
햇살은 떨어져 출렁거린다.
빈 邸宅을 울리는
기침소리처럼
音質이 고른 바람자락의
秩序.
혹은 수줍은 계집아이의 발소리가 鄭重히
꽃들 사이를 지나고
窓가에 새하얀
비둘기가 날으다가
간간이
잠 속으로 깃을 파묻는
寢床에서
園丁은 깨어나며 듣고 있다.
나불거리는
꽃의
이마를 적시는 鐘소리와,
無垢한 잎들은 잎들끼리
맞부비며 펴 오르는
純粹의,
계집 나이로 치면 펴 오르는 스물의
진한 몸내움새.
흔들리는 꽃들 속에 숨어
邊方의 하늘로부터, 가위를 든 園丁은
가장 淸明한 자락을 도려낸다.
Ⅱ
노래하는 집 둘레의 장미나무 가지 아래
푸른 램프의 빛은, 아직 꺼지지 않은 채 램프의 불빛은
薔薇의 그늘을 밝히우고.
간들간들 깊숙한
나무의 밑뿌리에 잦아들고,
불빛은 일렁이다.
햇살은 屈折 속에 때로는
안으로 접히며 탄다.
Ⅲ
부드러운 흙의 根柢에 滋養많은 깊이의
나무뿌리 끝에
출렁이는 기쁨의, 살아도는
그 成熟한 키대로의
風琴소리.
이슬 묻은 입술의 가상이로부터
薔薇들은
조금씩 조금씩 간절한 사랑을 소리내고 있다.
패인 귓불의 꽃빛, 불어 오르는
젖가슴의 은은한
醉興이여.
내가 걸어나가면,
램프의 近方, 그 四方으로
하얀 휘파람을 깔던 휘파람 같은 女人은
나의 薔薇.
피어오르는
그대,
아장한 궁기 속의 푸른 純潔을
내 처음으로 볼 수 있네.
-「아침 薔薇園」전문『오늘 죽지 않고 오늘 살아 있다』(청사, 1985)
위 인용한 시는 1967년 사상계 신인문학상 당선 시이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그의 시를 처음 접하고 나는 밑줄을 그은 구절이 있다. 흔들리는 꽃들 속에 숨어/邊方의 하늘로부터, 가위를 든 園丁은/가장 淸明한 자락을 도려낸다. 이 구절이 얼마나 깊었던지 지금도 그날이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청명한 자락을 도려낸다는 시인은 스스로의 목숨을 던져 다시는 결혼 같은 것 하지 않겠다는 아내와 세 딸들의 곁을 떠난 것이다.
나는 시인 김만옥을 두고 한 편의 시가 물들어 있으나 사생활의 윤리에서는 늘 비관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삶은 짧고 예술은 길다 했던가! 죽도록 시를 썼으면 죽도록 살아야 하지 않는가!
다시 나는 문학이란 인격을 생각한다. 시인 김만옥을 예시 했으나 나를 포함하여 문학하는 사람들의(물론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가면(person)속에 감추어진 내밀한 그 사람의 면면을 다 읽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삶이 문학이면 추하거나, 거짓이거나, 외면하고 싶은 모습들은 보이지 말아야 할 것이다. 최소한 건강한 문학을 위해서 혹은 독자를 우롱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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