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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漵 칼럼

할머니의 소원

할머니의 소원/ 정홍순 시인
2018-12-11 오전 2:13:18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순천시민대학 글쓰기 교실에 등록한 지인이 학기말 숙제로 수필을 써와 타자를 요청했다. 그녀가 쓴 수필은 대략 원고지 열매 정도인데 필자의 감성을 자극하기 충분하였다. 글의 내용도 감동이지만 16절지나 백지, 공책도 아니고 와이셔츠상자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각대기에 앞뒤로 정갈하게 써왔기 때문이다.


    이름 하여 ‘와이셔츠각대기’ 글이다. 한참동안 웃고, 또 웃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일흔둘의 나이에 시를 배우고, 수필을 배워 “봄 햇빛처럼 예쁘게 날고 싶어”서 글쓰기 교실에 다닌다는 그녀의 문장 가운데 눈에 띄는 문장이 있었다.


    “세월이 가져다준 아픔을 말하라면 해금의 심장에서 자진모리로 우는 숨을 꺼내듯 힘에 겨웠다고 말하고 싶다”는 표현이다. 이렇게 깊은 사유의 문장을 최근에 만나본적이 없다.


    한번뿐인 생애, 시간을 아껴 살고 싶다는 일흔둘 그녀의 소원은 “기억만이 달려가고 희망만 달려가는 과거와 미래보다는 내 작은 몸이 머물러 있는 아니,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내 삶의 승패를 결정할 시발점으로 스스로 느끼며” 누군가에게 글 한 줄이라도 줄 수 있는 것이 소원이라 하였다.


    꿈이 없는 사람이 정말 늙은 사람이라 하였다. 할 일 없이 시간이나 축내는 어느 노인이 아니라 세월을 아끼고 시간을 금같이 쓰며 사는 그녀의 소원이 너무 아름답다.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친근한 이야기들이 한편씩 조각보처럼 만들어져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늦게 글쓰기를 공부하고 문장이 터져 훌륭한 시집이나 수필집을 상재한 분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배움의 때를 놓치고 살아온 분들의 인생 이야기들이 감칠맛 나는 한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온 것을 볼 때마다 글(한글)에 대한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백성을 어여쁘게 여겨 서로가 소통하며 문맹 없는 나라를 바라신 왕의 뜻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니 말이다. 읽지도 못하다가 쓰는 사람이 되어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나라의 문명이며 세계의 문명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문명사회에서 미개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은 글이 차고 넘치지만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아직도 모르고 살기에 눈먼 소경들이 아니겠는가. 널리 세상을 이롭게 살아가기 위해 한 줄의 글을 배우는 소박한 ‘할머니의 소원’을 그들은 배워야할 것이다.


    한 나라의 글에는 민족정신이 들어있는 국가의 얼과 철학이 있는데 사문(死文)에 가까운 글과 말이 난무한 언어부재가 넘치는 정치, 경제, 종교 속에서 뜻 없이 살아가야 하는 죄가 너무 크다.


    왜 그럴까.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라 할 때 자신의 죄를 덜 가진 사람이 가난한 사람인데 물질의 소유에서만 해석하다보니 가당찮은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는 그 가난을 글에서 배워야한다. 요즈음 5행 이내의 짧은 디카시가 유행하고 있다. 디지털카메라로 자연이나 사물에서 시적 형상을 포착하여 찍은 영상과 함께 문자로 표현한 시라고 정의하고 있다.


    디카시는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학 장르로, 언어 예술이라는 기존 시의 범주를 확장하여 영상과 문자를 하나의 텍스트로 결합한 멀티 언어 예술’이다. 시조나 일본의 하이쿠와는 다르지만 누구나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공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우리는 단순훈련이 매우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언어에 단순훈련이 들어가 있는 것이 시조이며, 하이쿠가 아니겠는가. 이를 언어의 단사리(斷捨離)라 할 수 있는데 단사리는 ‘쓸데없는 물건은 버리고 죽여서 삶을 깔끔하게 정리하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미니멀리즘과 상통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외형적인 영성의 첫 번째도 바로 단순훈련이다. 복잡한 것을 단순화하고 최소한의 필수적인 것만 남겨두고 번잡한 것은 치워버림으로 더욱 영성이 나오는 힘을 기르는 것으로 포기하는 것(금욕주의)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결단양식 가운데 제일 필요한 것이 단순성이다. 여기서 자유가 나오고, 진정한 거룩한 중심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힘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단순이라고 하는 것은 소유에서 문제가 나온 것이기 때문에 소유문제가 단순화 되지 않으면 더 복잡해지는 것뿐이다.


    소박한 할머니의 소원처럼 ‘행복한 관계를 위해서 한 줄의 글을 나누는 것’이라고 한 말에 밑줄을 그어야 할 것이다. 미사여구에 화려한 글인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