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홍순 시인
마지막 단풍잎에 서리꽃이 피어난 아침 서둘러 길을 떠난다. 행선지는 사천왜성과 남해왜성을 답사하기 위해서다. 정유재란 칠 주갑을 맞이해 마지막 답사일지 싶다. 한 해 동안 임지왜란 전적지 여러 곳을 답사하였다.
그 가운데 순천왜성을 중심으로 이번에는 사천과 남해를 엮어 일정의 길을 만들고자한 것이다. 사천왜성, 선진리성에 오르니 바람이 벚나무 사이로 매섭게 불어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날을 두고 을씨년스럽다 했던가.
해설사의 재치 있는 해설에 귀를 기울이다가 두고두고 서러운 노래 한 자락에 마음이 젖고 말았다. 화답하는 마음으로 한 수 시를 적고 선진리성에서 발길을 돌렸다.
“봄이 오면 봄새라 부르고/봄꽃이라 부르다 떠날 때는/눈물도 없이 울어 누가 슬픈 것인지 모르게/선진리성船津里城에 벚꽃 만발하면/술 한통, 장구 걸머지고 동리 밖 사람들/꽃 속으로 몰려들어 실성하는 버릇이/오래된 버릇이라고 울던 소리 들었다//사남泗南 땅 화전花田에 목화같이/몽실몽실하게 피어나던 노래/메밀처럼 흐드러지던 딸들이/눈물로 울어/에비―에비/무섭구나 무섭구나/코 베가고 귀 잘라가는 놈이 무섭구나//귀도 코도 없는 댕강무데기/당병무덤에 벚꽃이 훨훨 넘쳐흐르고/봄이 오면 다시 에비―에비/무데기 언덕에 삐비꽃이 총총히 쌓여/콧소리 한번 불러 볼 라니/소리가 모자라는구나/물러간다 물러간다/가등청정이 쫓겨 나간 삐비 산천에//꽃이여/꽃이여/선진리성 언덕에 쾌지나 칭칭 피는구나”(졸시, ‘선진리 벚꽃노래’ 전문)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비경을 따라 남해에 접어들었다. 습기가 말라버린 남해바다는 짙은 물감을 파랗게 풀어놓고 있었다. 저 푸른 바다가 한 때는 전장의 바다, 죽음의 바다로 붉게 피로 물들였다니 바다의 속을 모르듯이 우리는 역사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남해는 지금 도로 확장공사로 분주하다. ‘길을 물어’라고 했듯이 남해왜성을 물어가야 했다. 관광지에는 알림판이 잘 정비돼있어도 남해왜성, 선소는 이정표가 없다. 아는 사람, 가본사람은 식은 죽 먹는 일이겠지만 옥에 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냥 돌아서기에는 아까운 하루다. 길 번지 선소로를 따라 남해왜성에 닿았고, 그 흔적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 잠시 서서 전투의 현장이 아니어서 일까, 단지 1000여명의 군졸들이 머물다 철수한 곳이어서 일까 하는 생각에 묻히고 있을 때 동정시비 앞에 서게 되었다.
나무를 베어서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하는 사람들, 허물 거나 파헤쳐서 역사를 없애고 싶은 사람들은 나라 안팎으로 존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아마 장량상의 동정시비도 그 가운데 하나였지만 규모가 큰 바윗덩어리였기에 역사로 남아 있음이니, 다행이지만 정벌시비 앞에서 한 없이 수치스런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동정시비는 명나라 장수 장량상이 1599년 10월에 새긴 것이다. 중국의 동쪽에 위치한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정벌했다 해서 ‘동정’이라 하고 자연바위를 새겼다고 ‘마애비’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내용은 명나라 이여송李如松 장군과 수군 도독 진린이 지원군으로 조선의 남해에 와서 일본군을 무찔렀음을 적고 있으며 시 두 편(장)을 새겼다. 이 전승 기념비에는 명나라가 전쟁에 임하던 태도와 감투욕이 숨어있었음을 통해 오늘의 우리들을 통렬히 비난하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유격대장 장량상이 쓴 비문에 “이에 저 명나라와 조선의 군사들은 섬 오랑캐를 물리쳐 폭동과 반란을 제거하고 만전을 꾀하였다. 모든 일은 반드시 싸워 이겨 여기에서 순리로 다스려 위엄이 이처럼 성하니 멀리 와서 정복하여 물리친 것을 밝혀 보이어 길이 알린다.”며 시 두 편을 남겼다.
“황제의 성냄이여 변방의 난 평정했네./장사의 분발이여 쉴 겨를 없었다네./긴창을 비껴 듦이여 화살도 세게 쐈다/완전무장 빛남이여 별들도 밝게 빛나/발해바다 건뜀이여 파도도 잔잔쿠나/긴 칼 날림이여 동쪽의 바닷가라/백성의 받듦이여 왜놈들이 항복했다//황제의 성냄이여 해외까지 벌벌 떠네/나라밖 정벌이여 죽은 해골 고요하네/ 무장병 기쁨이여 공을 따라 매진했네/왜놈들 막음이여 생선회를 치듯했네/부릅뜬 눈방울여 땅끝까지 다 살폈네/공바위 새김이여 길이길이 전해지네/이역땅 멀리 옴여 가주로 모셔지네”(장량상, ‘동정시’ 전문)
생선회를 치듯 했다는 동정시 옆에는 횟집이 성업 중에 있으니 잔잔한 바다를 보며 실음에 잠겨 더욱 11월은 적막하다. 거북선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천전투에서 뿜어져 나왔을 포성이 승전비를 세우고 떠난 명군과 당쟁의 비극으로 강토가 짓밟힌 역사의 현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 격발하여 한없이 멈추지 않는 파도로 들이친다.
사천전투에서 부상당한 이순신 장군이 갑옷 벗을 시간이 없어 피고름이 흘러내렸다는 말은 너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내년은 이순신 장군이 전몰한 해이다. ‘죽고자 하는 사람은 살 것이다’라는 장군의 연설이 들리는 것 같은 하루, 동정시비를 두고 쓸쓸히 떠나왔지만 우리는 오래오래 기억해야할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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