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지대에 거는 시의 말/ 정홍순
처음이란 미흡하고 부족한 것이 드러난다 하여도 확장의 의미를 분명히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확장은 공간적 의미만으로 제한 할 수 없고 한 알의 씨가 자라나 열매를 맺기까지 진정한 그것다움이라 할 수 있는데 처음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다가도 송두리째 잊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처음 나는 시의 말을 이렇게 적은 기억이 있다. “산다는 것에 대하여 속단하는 것도 실수일 것이며, 결단하지 못하는 것도 실수일 것이다. 나약함과 유한의 세계를 맴도는 유연한 시간 속에서 결국 중심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나 무한 한 선택의 자유와 의무의 책임 하에 인간중심주의 적이라는 말은 결단코 아니다. 단지 모든 표현이 자연으로 남고 인간의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옳게 살아야 하겠다는 작은 양심이며, 나의 시의 말”(?아직은 그대로 두자?)이라고 적었다.
타인에게 하고픈 이야기, 나는 자연과 인간의 공존을 시의 시작점으로 하여 그 기저를 삼았다.
하늘은
한 번은 꼭
반달로 떠서
내 얼굴을 반쪽으로 그리고 간다.
바다는
한 번은 꼭
조수에 밀려
내 마음을 간간하게 절이고 간다.
-⌜한 번은 꼭⌟전문
서정시를 ‘근원으로 돌아가는 욕망’ 이라고 에른스트 퍼셔는 정의한바 있다. 하늘과 바다는 우리가 살아가는 무한한 공간으로 땅을 구분하여 낸 창조주의 선물이기도하다.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우리에게 문명의 이기는 하늘과 바다를 병들게 하였고 근원을 생각하지 않는 물질적 본령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는 시대에게 우리는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반쪽으로 그리고 간’후에는 다시 활짝 웃는 얼굴, 희망을 담아놓은 하늘을 오늘도 올려다보고 있다. 서로 바라볼 수 있는 응시는 슬픈 것이 아니라 살아갈 용기와 가치를 주는 관계이다. 따뜻한 시선, 낙담하기보다 생명을 받아내는 신비가 깃들어있는 하늘에서 ‘간간하게 절이고 간’감치도록 생의 맛을 내게 하는 바다, 서로가 당기며 살아가는 인력이야말로 근원으로 돌아갈 욕망의 힘이다.
이처럼 내가 거는 시의 말은 인간적이고 자연적인 순연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표현은 영성의 다른 말이기도 한데 예술과 종교에 영성이 배제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미건조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영성이냐가 중요하다. 환각을 통한 초월의 세계를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영성이고 그 자신을 망치게 만들고 만다. 한 편의 시가 말초를 자극하는 것에만 써졌다면 이것은 타인에게 잘못 건 말이 된 것이다.
볶아 주세요
그리고
엄청난 눌림으로
터지게 하세요
인성으로 자라난 부르짖음을
참지 않게 하세요
으깨어져 일그러지는
희생만큼
향기로운 자아로
뿜어나게 하세요
한 방울 까지라도.
-⌜참깨⌟전문
혼탁한 향기에 일순하는 세상에 종교와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자기희생으로 향기로운 세상을 위한 헌신이 깃든 종교와 예술, 나는 구원으로 이끄는 ‘한 방울’의 시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는다. 물론 시가 종교이고 종교가 시라는 말이 아니다. ‘내가 겪은 宗敎的 경험으로/아직 체득하지 못한 사치스럽지 않은/맑은 기도 한 모금으로 핀 꽃’(⌜선인장꽃⌟)겨울에 핀 선인장을 보며 내 깊이를 알았고 아무리 애썼다 고해도 미천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일로 자연은 이렇듯 나의 스승이며 인도자이다. ‘구원으로 끄는 중지촌 사람들/넘어오다 말은 넋은/넘어가는 넋과 만나기도 하고,/풀어놓은 흑염소 떼 풀 뜯는 것인지/구름 뜯는 중인지 바위산 뛰며/새들은 가지마다 도란도란/장다리꽃대로 날아가는 나비’(⌜수만리 가는 길⌟)같은 시적 미덕을 위한 나의 탐색은 자연에 대한 태도인 겸손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을 거슬리지 않고 살아가는 수만리 사람들의 삶 속에 정 때문에 살아간다는 겸손은 인간 상호간의 원활한 언어소통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내게 시는 가난한 마음, 겸손으로 받혀내게 하는 정제됨이다. 또한 잃어져가는 것들을 꼭 붙잡도록 고집을 불어 넣어준다.”(?신덕리 아침?)고 하였다. 그리하여 자유라는 것은 본래의 것으로 앞서 말했던 근원의 같은 의미로 보는바“자유는 없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는 것 또한 아니다. ... 인간됨의 굴레를 벗으려 한다면 가장 추한 몰골이 될 것이며 아름다움의 진실도 없을 것”(?신덕리 아침?)이다.
시적 신앙이나 시적 효용을 구원으로 파악한 R.M 알베레스와 같이 인간을 향한 끝이 종교와 예술(시)로 추구하고자하는 것이 나의 통로이다.
영악한 사람들에 끼여
여태껏 한 일이 무엇인가
다소간 나는 바보다
눈치 없는 숙맥 그런 정도가
내 상식이라는 것 밖에는
부모는 둘도 없는 줄 알겠지만
당신의 종자였기에
거두고 봐주었을 뿐이다
개별 한 심사가 뭐 있을까
사람 같은 놈 더러운 놈 되지 말라 한
無學의 道 가르침 하나는 분명하다
오늘도 실시간 전광판에 붙은 허용기준치
복용법 무시하고 종합감기약처럼 먹은
양심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공존지대,
한 권의 책으로서 엮은 예전의 임무를
후천으로 받은 성무가 생의 도구이며
무기인 나의 복무는 종교지역이다
생사, 한편은 살리는 것이고
한편은 무지하게 해악한 오존 같은
두 경계 파묻혀 사는 것이 업이다
오염지대에
어두운 비가 쏟아지고
구멍 난 하늘로 별이 빠진다
지상을 오르지 못하는 혼들
입에 매달린 풍선처럼 못된 사랑만
나 또한 터질 테니까
-⌜오존경보⌟전문
나는 스스로가 회심한 개척신앙자다. 우상을 숭배하던 가정에서 기독교를 받았고 역으로 부모에게 기독교를 전파했기 때문이다. 나는 믿고 신학을 한 것이 아니라 신학을 하며 믿은 지식에서 신앙이 싹트게 된 특이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사실 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었었다. 그 결과 외도의 길은 신학을 마치기까지 학부과정을 만 십년에 졸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신학 함이 본업이 되어 영적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다. 나는 이렇게 하나이나 나의 방법은 두 가지에서 하나의 지극히 인간적이어야 함을 찾아내게 되었다.
부모로부터 받은 가르침은 ‘무학의 도인’ 참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이든 문학이든 누구나 구가해야 할 길이다. ‘귀 잘린 갈대교도들/허튼소리어거지소리비렁뱅이소리거짓부렁이소리/다 잘려나간다’(⌜갈대가 가끔 칼 쓰는 날⌟) 진실이 왜곡된 해악한 문화로 ‘오염지대에/어두운 비가 쏟아지고/구멍 난 하늘로 별이 빠지’는 파괴된 오존층 아래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못된 사랑’을 버리고 참된 사랑을 ‘전답 물려받아/투사답게 살 놈 새끼’(⌜농번일기⌟)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문학정신은 종교관만큼이나 중요하다. 문학인으로서의 의식, 태도, 방향성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 가운데 나는 상상의 힘을 중요한 자원으로 여기고 있다.
텅 빈 갈대뿐이거나 여자만에서 올라오는 갯물
그대 상상의 힘으로 순천만은 살아간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산다면 다 망하는 이유
그대 또한 망하는 이유다
-⌜우리가 사는 이유⌟전문
‘상상의 힘’이 영성에서나 문학에서나 얼마나 큰 힘을 전가하는 가를 우리는 모를 리 없다. 사유에 제한 된 구태 연함이 아니고 사변에 가둬진 객관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에서 유발한 상상의 주관이 생명의 끝에 닿는 자유이며 공존지대에 거는 말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근원에 닿는 ‘상상의 힘’으로 나를 언제나 통찰하고 찾아내며 끝까지 연마하고자 한다. 이것이 서정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의 과제라 생각한다.
'문학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학이란 인격을 두고 (0) | 2017.10.18 |
---|---|
정유재란과 우리고장의 문학 (0) | 2017.10.18 |
인연의 물꽃 (0) | 2017.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