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권 시인의 갯벌 풍류/ 정홍순
“시가 써지지 않을 때는 순천만에 나가봐라.” 설 선물로 연작시 〈갈목비〉를 보내며 적어 보낸 송수권 시인의 편지 한 구절이 생각나는 날이다.
11월의 갈밭 하늘에
먹물 몇 점이 번진다
창공 높이 도요새떼 떴다
비오리 고방오리 쇠오리 청둥오리 재갈매기 고니떼
연이어 솟아오르고
일필휘지一筆揮之 검은 밧줄을 늘였다 당기며
기러기떼 행렬이 먼 산마을 쪽으로 들어간다
서녘 하늘을 서대는 갈바람 소리
온몸 저리며
용산龍山 등허리에 걸쳐 지금 막 떠오르는 갈목 같은 저것은
그믐달인가 초승달인가
수묵 몇 폭을 남기고도 낙관을 찍지 못해
안달하는
아 이 저녁 어스름
-송수권, 〈갈목비4〉전문
사월이 시작되던 지난 1일에는 화창한 남도의 봄기운을 맡으며 송수권 시인의 업적과 문학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사)송수권시인기념사업회’ 창립총회가 있었고, 1주기 추도식이 고향 고흥군 두원면 학림리 유택에서 있었다.
그동안 창립준비위원회의 힘겨운 노고에 힘입어 이사장에 나태주 시인, 상임이사에 천창우 시인을 중심으로 기념사업회가 명실 공히 출범하게 되었다. 앞으로 고흥군의 적극적인 후원과 함께 송수권 문학 연구 및 조명, 생가·유품·유택 보존 및 문학테마파크 조성사업, 송수권시문학상 시상 및 문학제, 송수권 문학의 발굴(유고포함) 및 출판·배포사업, 송수권 문학교실 등을 운영하게 될 것이다.
회의에 앞서 오세영 시인(서울대명예교수)은 송수권의 시세계를 논하면서 우리나라 서북에 김소월과 백석이 있다면 이남에는 김영랑과 송수권이 있다고 하였다. 이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민족의 가락과 향토성이 짙은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데, 특히 김영랑이 민요의 단가를 입고 있다면 송수권은 판소리의 가락을 입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였다.
송수권 시인은 생전에 전라도 사투리가 내 시의 표준어라고 하였다. 이는 오세영 시인이 밝힌바와 같이 판소리 가락을 입고 있었기에 시인도 자신의 시론에서 시의 표준어를 전라도 사투리라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의 표준어를 전라도 사투리에 두었고, 시의 정신은 대나무, 황토, 갯벌에 두었으며 이를 남도정신이라 하였다. 또한 문화사적 측면에서는 풍류문학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소천하기 전까지 한국풍류문화연구소장을 지냈던 것이다.
연세대 유동식 교수가 한국 신학을 대별하면서 한·삶·멋이 깃들인 풍류신학을 소개한 바가 있었다. 한국적인 것을 신학에서 찾아 계승하려는 것과 같이 풍류문학은 최치원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정읍시 칠보에서부터 발흥한 풍류문학은 최치원에서 정극인(〈상춘곡〉)으로 이어지는 가사문학이다. 이를 태산풍류라 하고, 무등산을 중심으로 담양 창평의 계산풍류, 화순 적벽강과 지석천을 거쳐 흐르는 드들강의 적벽풍류, 장흥 천관산을 중심으로 한 탐진풍류 등 가사문학권의 흐름을 찾아볼 수가 있다.
풍류는 음풍농월(吟風弄月)을 읊고 즐기는 것으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역사의식과 선비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이 풍류이기 때문이다. 정여립 사건으로 시작한 동인과 서인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으로 인한 정철의 기축옥사는 결국 전라도 인재를 등용시키지 않는 비극을 낳았고, 선비들은 풍류에 젖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김선태 교수(시인, 목포대)는 송수권의 시론에서 다음과 같이 쓴바가 있다. 송수권의 시에 구현된 대나무의 정신이라 함은 지조와 절개보다 남도민의 풍류의식이나 역사의식을 상징하는 정신을 말한다. 그가 직접 설명한 바에 따르면 “수 틀리면 죽창을 깎아 외적을 막아내고, 태평한 세월엔 대금, 중금, 소금 피리소리로 뜨는 가락의 정신”(난세엔 죽창, 호시절엔 피리)이다.
이러한 시 정신과 시론으로 통하는 고찰에서 필자는 송수권의 풍류를 변산에서 천착하여 가져 온 질펀한 생명력이 숨 쉬는 순천만의 갯벌로 그 흐름을 놓고자한다. 변산에서 갯벌의 정신으로 펴낸 시집이 《수저통에 비치는 저녁노을》(시와시학사, 1998)과 산문집 《남도의 맛과 멋》(창공사, 1996), 《쪽빛세상》(토우, 1998)이다. 여기에 20여년이 지나 마지막 남긴 유작으로 〈갈목비〉 연작시를 순천만에서 남겼다.
앞선 풍류도의 흐름에 입각해서 송수권 시인을 갯벌 풍류로 명명하고자 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이다. 무리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문화사적인 면에서 읽어야 할 때 갯벌 풍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시를 만나라고 했던 순천만에서 적은 시 한수로 송수권 시인의 〈갈목비4〉에서 받은 감명과 갯벌 풍류를 새겨놓고자 한다.
못대가리가 하얗게 벗겨진/무진교에 올라서서/휘몰다 간 바람 당신도 나처럼//새가 갯고랑 깨우고/봄 불러오듯이/남도 풍류 한 자락 청소골에서 흘러/이 나지막한 갯벌에 놓고/짱뚱어처럼 펄펄 뛰고 있지요//평전이 일으킨/순천만 갯벌 풍류/태산 풍류 아래 노을에 익힌 갯벌로/곡선의 시가 한창입니다//갈대밭 수줍은 달과/풋풋한 사랑 날리기도 하고/끝끝내 하늘 목 놓아 부르는 질퍽한 땅//갯마당에/반질반질 울어 윤이 나는 갯벌시/갈목 잡아 한 줄 쓰고/술 때 지나면 다시 한 줄 씁니다
-졸시, <갯벌 풍류 2>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