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순 2020. 6. 25. 08:03

 

 

 

응달/ 정홍순

 

 

눈이 받아온 기운 없이는

나를 미끄러지게 못했을 것이다

한나절 덜어내고 남은 농로에서

자동차 바퀴 하나가

몹시 흔들리다 간신히 섰다

노인이 사는 응달 집

간척지에서 발라낸

길이 기다랗게 야위었다

보면 볼수록 겨울 닮은

노인네 얼굴

눈물에 긁히고 남은 자리로

나는 말끝마다 미끄러졌다

수십 마지기 간사지에

열 남매의 아버지, 이제는 홀로

등불 켜야 한다

밤이 제일 긴 동짓날 나는

난생 처음 새벽이 오기까지

뜬눈으로

고스란히 미끄러져 보았다

 

 

*어느 겨울 작은아버지 뵈려고 가다가 눈길에 자동차가 미끄러졌습니다. 미끌미끌 눈길을 헤치고 홀로 계신 작은아버지를 뵙고, 사실 그날 밤 서산 백순이 형 집에서 꼬박 잠 못 들고 날을 샜습니다. 많이도 사랑해주시고, 따뜻한 말 한마디 고루 나눠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농수용차로 백순이 형하고 농짝 싣고 고흥 포두까지 오셔서 살펴주시고 가신 분이 작은아버지십니다. 이 작은 조카는 목사 일을 보면서 시인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삶의 자양분을 주시고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한 분씩 가시는군요. 올해도 새 시집이 출간되는데바람은 갯벌에 눕지 않는다에 작은아버지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응달입니다. 작은아버지 영전에 이 시를 바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평안히 쉬십시오.

 

2020624

 

조카 정홍순 배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