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사투(死鬪)하는 사투(四TOO)사회

정홍순 2019. 4. 24. 03:44
사투(死鬪)하는 사투(四TOO)사회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2019년 04월 24일(수) 00:00
/정홍순 시인
봄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계절도 없다. 동장군이 물러 간지 엊그제다. 아마 꽃이 피었다 지는 속도감에 더 빠르게 느껴지는 것일까.
‘벌써’라는 말을 이끌고 봄은 이렇게 왔다 간다. 세월의 빠름을 그 연배만큼 느낄 수 있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변화는 속도감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긍정과 부정의 두 속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또한 불변의 변화도 인식의 범주 안에 늘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변화무쌍이란 말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세상이 많이 변화했다는 말에 어느 교장선생님은 “교과서에 실린 동시를 보면 알 수 있는 데 농촌의 이미지와 정서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여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어린이들의 심상에 비추인 변화의 모습에서도 여실히 찾아볼 수 있는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사람이 변화한다는 것, 인간의 특성일 것이며 겸양의 미덕 가운데 한 자락일 것이다. 죽기까지 수 없이 변화하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타고난 기질, 천성은 쉽게 변화하지 않으니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다. 물은 얼리면 쪼갤 수 있다지만 사람의 마음을 누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문제는 늘 자기 자신에게 있다. 한때 ‘자기성찰’에 대한 책이 돈 버는 이야기, 여행이나 먹거리 이야기만큼 잘 읽히던 때 데이비드 J. 리버만의 ‘나에겐 분명 문제가 있다’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있었다. 다시 책을 펼쳐드니 몇 가운데 눈에 띄는 구절이 들어왔다.
리버만은 “‘만약에?’로 시작되는 쓸데없는 공상에 낭비하는 시간을 좀 더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데 사용한다면, 더욱 활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이란 말은 부정적 요소가 들어있는 말이다.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비현실적인 공상에 사로잡힌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만약이란 말이 자신의 공상에서 무차별적으로 관계 속에 침투한다면 어떻겠는가. 끔찍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소설 속으로 독자를 다 몰아넣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힘이 있는 것처럼 과신하는 사회가 오늘의 현실이다.
진정성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사투’(死鬪)해야 하며 ‘사투’(四TOO)하고 있다.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신조어가 있다.
소위 미투, 빚투, 녹투, 약투 등으로 쓰이고 있는 단어들이다. 언론에서는 ‘미투’를 패러디해서 사용하고 있는 이러한 신조어를 무분별하게 남발하고 있는 데 이것은 엄연한 언론실격이라 할 수밖에 없다.
미투는 ‘나도 성폭력 피해자’라며 자신이 겪은 성범죄를 고백하고 그 심각성을 알리는 것이다.
빚투는 ‘나도 연예인의 부모에게 채무피해 당했다’고 유명세에 달려들어 폭로하므로 빚을 받아내려는 불법추심 행위이다. 녹투는 ‘녹음을 들이밀면서 나도 당했다’고 하는 것이며, 약투는 ‘나도 약물을 투여했다’고 폭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미투의 성격과 내용을 잘못 이해하거나 오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소수자나 약자의 편에서 신중히 써야 할 말들을 편리하거나 빠르게 써야 한다는 이유로 언론마저 남발하고 있는 것은 자제해야할 일이다. 사회가 아무리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고 해서 무게감마저 내버리고 쓰는 글이 돼서는 안 된다.
언론은 단순히 알권리만 챙겨서도 안 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사표의 진중한 자세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이야기는 없고 남의 이야기에만 몰두하고 사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다. 타인의 단점은 곳 나의 단점인 것을 모르고 사는 것도 무지한 것이다. ‘폭로’는 비난의 대상이기도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용기이기도 하다. ‘커밍아웃’은 지금도 설자리가 녹녹치 않은 것이 우리 현실이다. 소수자들의 아픔을 보듬을 만큼의 사회를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투와 달리 녹투는 우리나라가 녹음공화국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경우이다.
현행 통신망보호법에는 ‘공개되지 않은 타인간의 대화를 녹음·청취해선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당사자가 된 대화는 불법이 아니라는 뜻을 담고 있다. 당연히 처벌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지금도 소형 버튼이 눌려져 녹음되고 있는 이야기가 언제 폭로될지 아무도 모른다.
자신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서 죽어라고 싸워야한다. 사투(死鬪)해야 하는 사회다.
‘위인들은 사상을 논하고, 보통사람들은 사물을 논하고, 소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하였다. 가십거리에 흥미를 두고 살아간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나? 다시 한 번 물어보아야한다.
우리사회는 지금 백세시대로 마음건강이 더 위험하다. 건강은 몸만을 말하지 않는다. 마음도 건강해야 한다. 건강을 위해서 조깅을 하듯이 마음을 위해서도 조깅이 필요하다. ‘마음의 조깅’이다. 명상이나 독서, 음악 감상, 등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적절한 운동이 필요하다.
오늘도 비생산적이거나 진정성 없는 공방(공상)에 죽어가는 시간과 물질이 가득 쌓여 있다. 못된 ‘명분’들이다.
꽃이 지고 나면 그 꽃자리에서 무슨 열매가 맺는지 ‘열매를 보면 알 것’이라는 진리가 우리의 봄을 일깨운다. 꽃이 슬퍼하는 이유가 있다. 지고 다시 피어도 꽃은 꽃이기에 사람 아닌 것들을 보고 꽃이 슬퍼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