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빈곤 포르노'와 저질 예술

정홍순 2018. 8. 13. 07:48
‘빈곤 포르노’와 저질 예술/ 정홍순 시인
2018-08-13 오전 7:37:26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사진만큼 사실적인 기록은 없을 것이다. 반면에 연출되는 작법도 사진만큼 발달된 것도 없을 것이다. 처음부터 사진은 어쩌면 두 가지 사실을 가지고 인간의 예술 속성에서 탄생했는지 모른다.


    최근 이탈리아 출신 사진작가 알레시오 마모가 인도의 가난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 월드프레스포토(World Press Photo) 소셜 미디어에 게재해 구설수에 올라있다.


    인도의 비참한 빈곤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 ‘꿈의 음식’ 시리즈로 제작된 사진들, 이 작업을 하면서 마모는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먹고 싶은 음식들을 상상해보라”고 어린 아이들에게 주문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식탁에 차려진 각종 음식과 과일들이 플라스틱 모형이었다는 것에 네티즌들로 더 큰 분노가 일어난 것이다.


    최소한 모델로 나선 아이들에게 밥이라도 한 끼 주었어야 더 인간적이지 않았겠는가라는 질타가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행위로 상이나 의식하는 마모의 행동에 다들 안타까워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 어느 겨울이었다. 흑백사진을 주로 찍는 작가와 함께 동행 한 적이 있었다. 파릇파릇 자라고 있는 보리밭에서 몇 차례 팔영산을 찍었다. 그리고 소나무가지 사이로 팔영산을 찍을 요량으로 소나무 가지를 들고 서있어 달라는 부탁에 소나무 가지를 치켜들고 서있었던 적이 있다.


    그때 사진에서 사실과 연출이라는 이중적인 작가의 예술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냥 보리밭 사이로 찍은 팔영산보다는 소나무가지 사이로 찍은 팔영산이 더 멋이 있었음을 알았다. 이렇듯 진짜 있는 그대로를 찍었는지, 연출했는지는 기록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나 이미지를 전달받는 사람들이 윤리와 도덕적인 면에서 작가의 인격을 먼저 말 할 수는 없다. 이번 ‘꿈의 음식’ 시리즈처럼 고발과 예술에 대한 반응이 드러나기까지는 말이다.


    진실을 원하는 만큼 가짜라는 것이 비례하여 나타나는 사회이다. 그럴듯한 인간 사회에 응당 있을법한 이야기(fiction)에서 사실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또는 보정한 사진을 보며 사실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는다. 문제는 상술에 급급해 꾸며내는 것들, 저질 예술이나 뉴스에 속았다는 사실이 드러날 때 모두는 참을 수 없어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예술행위를 억압하거나 구속할 수는 없다. 자신의 의지와 달리 체제하에서 표현하는 예술이 아니라면 말이다. 달에서 보내 온 사진이나 화성에서 보내 온 사진, 저 깊은 심해 혹은 극해에서 찍은 사진 등 한계를 넘나드는 사진을 볼 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역사적 장을 더해준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에 대한 우리의 용어를 살펴보면 참 의미가 깊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진(Photography, 빛으로 그리다)은 실물과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사(寫)적인 면과 내면의 정신도 나타내야 한다는 진(眞)의 동양회화정신의 전신(傳神) 철학이 담겨있다.


    단순히 ‘빛으로 그리다’는 말과 우리의 사진이라는 말의 차이가 담고 있는 의미로 볼 때 내면정신이 일정 담보돼있다는 것을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빈곤 포르노’라 함은 구호단체들이 앙상한 뼈만 남은 아동들을 클로즈업해 모금을 유도하는 방식을 비판할 때 자주 거론되는 용어다.


    보통 사진을 시각적 창조예술이라 한다. 그러나 ‘충격적인 이미지’만 부각시키는 행위, 즉 벌거벗은 뼈만 남은 아동들을 찍는 것에 비판이 제기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적인 기록에도 이처럼 비판이 따르는데 모형으로 연출을 유도한 행위는 현장감은 있을지 모르지만 내면정신이 사라진 상술에 지나지 않는다.


    눈으로 기억된 것은 구구한 말의 설명보다 항상 진실에 가깝게 여겼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는 뜻으로, 무엇이든지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로 ‘백문불여일견’이라 하였다.


    하지만 눈속임, 왜곡된 사실, 시각에서 생겨난 욕망, 즉 윤리적 비판이 끊임없이 일고 있는 ‘몰래카메라’와 같은 부도덕한 사회문제가 지능적으로 발달되고 있다. 어쩌면 관음병자가 더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부추기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사진의 훔쳐 보여주는 역기능의 하나일 수 있다. 남의 모습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도 여과 없이 방출하는 관능에 사로잡힌 미적 행위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미디어시대를 환호한 것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공허한 시각에만 몰두 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마모가 알권리차원에서 보도한 사진이었다고 해도 더 진실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위작은 위작이고, 연출은 연출이다. 보도정신에 진정한 사실을 통해 감동할 수 있는 프로정신이 참으로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