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정홍순 시인의 갯벌 풍류의 소고

고, 송수권 시인의 근본사상이었고 호남의 3대 정신으로 널리 알려진 갯벌정신을 노래한 정홍순 시인의 "갯벌 풍류" 연작시를 연재해 본다.
정 시인은 충남 태안반도 출신이다. 그는 바다와 갯벌에 대한 향수를 지울 수 없었는지, 자신의 어린날을 그리며 갯벌에 관한 이야기와 추억, 그리고 낭만이 더덕더덕 묻어나는 시를 쓰고 있다.
특히 그는 송 시인이 살아생전 부탁했던 판소리두루마기를 걸친 시를 써야했고 써야만 했다. 판소리가락 속에는 선인들의 한이 서려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풍류가 흐르고 있다. 황토정신과 대나무정신이 녹아내린 갯벌은 정신문화는 물론 무수한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우주를 품고 있다.
따라서 그는 우리의 한을 노래했던 송 시인의 게미 내지는 그늘을 벗기는 작업으로 "갯벌 풍류"를 건져 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한을 타고 넘으며 판소리가락으로 승화시켜야 했던 송 시인의 마음밭을 일구는 정 시인의 갯벌 풍류가 돋보인다.
갯벌 풍류 1
물결의 소요가 시작되었다 갈대가 서 있는 곳까지는 초저녁이면 당도할 것이다 갯고랑에 매 놓은 배가 떠오르며 달을 싣고 있다 길이 묻혔다 칠보 詩山에서 흘러내린 유상곡수 평전의 시가 서걱거린다 살 부비는 소리 간지럼 태우는 소리 잠자리 다투는 어린 새가 칭얼거린다 포석정으로 경주가 망했지만 오늘밤 갯벌시로 인하여 망하는 일은 없으리라
평전은 술을 못했다 나는 술을 따른 적이 없다 대신에 고독의 잔 다량의 눈물 얼마큼 마시어 가라앉은 산의 뿌리 건널 수 있을까 저 굽이쳐 오는 물 언덕 부서지도록 찾아온 결국 물이 되고 마는 것을 오늘도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다 내 쓴잔은 내가 마셔야 한다 몇 순배 돌린다 하자 그래도 내 눈물은 내가 마셔야 한다
푸른 고독 갈대밭에 던질 때 우리 가슴에 가라앉는 것이 돌보다 무겁지 않던가
갯벌 풍류 2
못대가리가 하얗게 벗겨진
무진교 올라서서
휘몰다 간 바람 당신도 나처럼
못을 밟고 갈대를 보겠지요
새가 갯고랑을 깨우고
봄을 불러오듯이
남도 풍류 한 자락 청소골에서 흘러
이 나지막한 갯벌에 놓고
짱뚱어가 펄펄 뛰고 있지요
평전이 일으킨
순천만 갯벌 풍류
태산 풍류 아래 노을에 익힌 갯벌로
곡선의 시가 한창입니다
갈대밭 수줍은 달
풋풋한 사랑 날리기도 하고
끝끝내
하늘 목 놓아 부르는 진퍽한 땅
갯마당에
반질반질 울어 윤이 나는 갯벌시
갈목 잡아 한 줄 쓰고
술 때 지나면 다시 한 줄을 씁니다
갯벌 풍류 3
평전이 적막한 바다 끝으로 물러가기까지
변산반도에 있었고 지리산과 섬진강
흑룡만리의 섬 제주에 있었다
언젠가는 만주벌판에 서서
백두산 흔들 것이라 했으며, 저 예루살렘
사해바다 진펄 위를 걸어보리라 하였다
사구시의 땅 산문의 업 등에 지고
눈물 조용히 눌러 놀 돌 하나
가슴에 품고 맛 따라 멋 따라
시 치며 걸었다
그늘 깃들인 개미 나는 빠꿈살이
어느 날은 석남꽃 꺾으며
뻐꾸기 소리 받아 아침 강 서성이던
물빛을 그리워했다
더러는 평전을 불도인의 샤먼처럼 말하나
민중의 대세 찾아
이 땅 조선의 매화, 대숲소리로 울었고
갯벌에 노을 적시며
붉은빛 물든 수저로 밥 뜨고 살았다
시라는 게 별것이더냐
낚싯대 서로 걸어두고
탕탕이 낙지 한 접시면 그만인 것을
봄눈에 줄을 걸던 순천만
바람이 팽하고 채 올릴 때마다 타던 거문고
적막한 바다 화포에 표표히 한 채 서있다
갯벌 풍류 4
태풍이 부는 날은 태풍이 참나무를 흔들어서 깨우지만 그렇잖은 날은 참나무를 내리쳐서 깨워줘야 한다네요 지리산 베고 누어있는 참나무가 큰 망치질이나 태풍에 흔들려야 종균 번식이 잘된다고 지리산 벌꾼은 표고치기 하러 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자빠진 참나무가 털썩털썩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네요 빗줄기 속에서 쇠망치 손이 번쩍 치켜 오르는 순간 가리왕산의 눈먼 벌치기가 키운 딸이 생각나고, 달궁 아리랑 부르며 노고단에서 하산하고 있는 평전의 목소리가 귓구멍 찢어지게 들리는 것이 아닙니까
“시가 써지지 않을 때는 순천만에 나가봐라”
시치기 하라고 갯벌로 내모는 뜻이 뭘까요
지리산 벌꾼 아버지는 생업을 가르쳤지만
시가 생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깃장 한 번 놓고는 미적미적 순천만에 나갔지요
갯벌이 내려다보이는 쇠리에 서서
구름 서너 장 접어내
쓰다 말다 한참 시랑 다투고 있는데
비가 꽂히는 갯벌로
밀물을 몰고 있는 오월의 목동을 봤습니다
오월의 목동, 오월의 목동을
갯벌 풍류 5
울지 않는 바다에 누가 갈 수 있을까
누가
숭어 떼 푸른 비늘에 써놓은
아카시아 꿀 같은 詩 먹을 수 있을까
갯벌에 머리 박던 새가
새벽 몰아올 때까지
밤새 던진 비에 쓰러진 갈대들이
천천히 일어서기까지
울지 않는 갯벌에 누가 갈 수 있을까
가끔은 타인처럼 산다
조금 더 가까우면 가까울 수 있다면
눈이 시리도록 출렁이는 이별
사람 마을에 해마다 그리움이고 싶다
갯벌 풍류 6
햇고사리 살짝 데쳐 조르르 깔고 실팍한 정어리 한손 얹어 불붙이면 콧구멍이 벌렁벌렁 뚫어진다 삼지창 두엄 퍼 얹듯 쌈 싸다보면 체면이고 뭐고 두 눈 홉뜨고 혓바닥까지 삼켜질 듯 흥이 솟구쳐나는 이것이 남도 맛이란 것, 뻘배 타고 나가 발고기 건저 그 중 도다리 몇 마리 쑥국 끌이면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요것이 남도 깊음이란 것, 하늘에는 바람이 흐르고 땅에는 물이 흘러 내가 너를 만나고 네가 나를 만나 새롭다, 현묘한 도가 이것이라니 최치원 선생의 풍류가 흘러들어 집집마다 정어리 쌈 싸고, 도다리쑥국 뜨는 갯고랑으로 숭어들이 갯벌 핥으며 춤추는 날, 갯땅 누비며 질퍽한 갯벌에 올라 서러울 때마다 가락은 높고 맛은 깊어지게 치는 사람들, 목구멍에서 심지 꺼내 불붙이는 사람들, 숯덩이가 장독에 뜨고 송홧가루가 누르스름하게 앉아 도가풍이 흐르는 봄날이 오면, 시름시름 앓다가도 정신이 번쩍 들어 뻐꾸기소리 슬며시 붙잡고 울어본 듯이 목젖에 붙이는 이것을, 남도 멋이라 하는 것 아니던가
갯벌 풍류 7
검은 잎
서늘히 빛나는 이름들이 사는 갯벌이다
다소곳이 머리 들어라
갯벌에 배 깔고
십오 도 정도는 이망*을 들어야 한다
너무 숙여 박혀도 안 되고
너무 들어 채여도 안 되고
겸손하게 머리 들어라
배고픈 누에처럼 온 힘을 다해 오르며
갯벌여인들이 쓰는 것처럼
썰물에 쓰고
밀물에 지우는 몸글, 생물의 글을 쓰다
잎새 위에
노랗게 적은 이름이 밤마다 빛나듯이
*이망: 뻘배의 앞머리
갯벌 풍류 8
갯벌 주둥이에 서면
저절로 입이 떨어져 흘러나오는 소리
오래전 박힌 말뚝에
부지런히 끌어다 매는
해오라기 소맷자락에 춤추는 댕기가
선禪입니다
선仙입니다
선線입니다
갯벌 풍류 9
소리쟁이가 떠올라 바람 한 소쿠리 이고 가는 방죽거리 모내기가 한창이다 쑥부쟁이, 쑥 잎이 너풀너풀 오른 논머리에 자리 깔아놓고 나누던 새참은 사라졌다 이양기 소리에 풀꽃 한 송이 피어나고 있는 대대, 갯논이 파랗게 흔들리고 있다 새들마저 침통해졌다 갯둑 너머 밭에 나문재가 통통하게 오르는 이맘때 황발이 잡아서 간장에 넣고 보드란 잎은 쳐다 시큼하게 매실초로 무쳐내던 남도의 식탁, 갯바람 나던 새들도 오늘은 기운이 없다 식초에 버무려지고 된장국에 파랗게 녹아들던 입맛은 슬펐다 소리쟁이가 슬펐다 쑥부쟁이와 쑥이 슬펐다 갯논에 머리 고이던 아버지가 슬펐다 이제 봄은 가고 슬픈 힘이 사라졌다
갯벌 풍류 10
새들이 와글와글 떠나기 시작하면
연화장蓮花藏이 되는 갯벌위에
환한 노을이 피어난다
우리들의 선녀는 오늘도
날개가 없다
겨드랑이에 날개 돋아
날아가는 새처럼 승천하는 천사가
아니다 우리들의 선녀는
오늘도 날개가 없다
서해 변산반도에서 피고
여자만에서 피는 노을꽃에 우리가
눈물을 쳐주면 사뿐 수직하는
우리들의 선녀
해가 지고 나니 종적이 없다
평상심으로 살아가자
불평하지 말고 살아가자
무엇을 베풀지나 생각하며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