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접도(猫蝶圖)를 보면서

정홍순 시인
도다리쑥국을 점심으로 함께 하자는 식당에 들렸다. 범상치 않은 그림위에 수저와 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였다. 일순간 식당 주인장의 배려거나 식견 정도로 생각하며 호사라 여기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순간 양동식 시인께서 “그림을 보았는가!”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림은 코팅한 김홍도의 묘접도(猫蝶圖)이었다. 문제는 그림 뒷면에 ‘묘접도의 비밀’이라는 시인의 단상이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후배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봄을 맞이하는 시인의 마음속에서 장수만세 코드를 함께 나누고자 하는 아름다운 그림은 그렇게 책상위에 놓이게 되었다.
묘접도를 모질도 라고도 하는데 중국인들의 ‘묘접’과 ‘모질’은 고양이묘자와 90세 노인을 가리키는 모자가, 나비접자와 80세 노인을 가리키는 질자의 발음이 동일한 음가를 가차한 것으로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묘접도를 보면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고양이를 ‘나비’야 하고 부르는 연유가 이제야 풀리게 되었다. 고양이와 나비, 모란과 패랭이(석중화)가 함께 한 폭의 그림에서 인생의 연수를 기원하는 이음줄이라는 것을 말이다.
누군가가 쓴 “담장을 보드랍게 접었다가 펼치는 길고양이의 줄무늬”가 세상의 이음줄이라고 하였던 문장이 떠오른다. 필자에게도 한두 해지만 길고양이의 애틋한 기억이 있다. 귀티 나는 고양이 한 마리가 마치 우리 집 고양이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하였고, 식구로 받아들여 집 안에서 겨울을 보냈다.
시골 고양이가 그러하듯이 집 안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집, 동네를 여럿이 어울리며 싸움도 하고, 말썽도 부리며 친구를 불러들이기도 하는 개구쟁이가 되었다. 우리는 그녀석의 이름을 ‘나니’라고 불렀다. 나니와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았다.
찻길 옆에서 사는 집고양이가 된 나니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제집이라고 찾아와 마지막 눈을 감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그를 화단에 묻어주고 필자는 조시(弔詩)같은 시를 쓰게 되었다.
“아이들아,/처마 밑으로 찾아든 괭이가 있거든/그냥 돌려 세우지 마라/서리 맞은 호박넝쿨 같이/모가지에 감고 온 월세방이다/된장 내 나는 토방에 엎어져/고향 떠나지 않겠다고 앙앙거리는/저 달빛의 야윈 꼬리를 봐라/짱짱하던 달이 월세 까먹듯 기울어/졸고 있는 두 눈에/꽃차례 모아 흔들고 있는/수풀의 달이 얼마나 그늘진 가를...../우리나라 산천마다 피고 지는/이름이 괭이눈이란 것이고/담장 밑으로 찍어놓은 점들이/우리들 입속으로 얼마나 시큼하게/들이치던 풀이더냐/아이들아,/우리들의 괭이는 괭이눈이라고/괭이밥이라고 토종의 이름을/거닐고 사는 신통한 할아버지시다/할아버지는 호랑이가 아니다/포효하지 않고 갈그랑거리다/꽃이 되고 풀이되는 달빛의 족보다/수틀린 세상에 척척/산을 뒤집고 토담 뒤집어 놓은 꽃/너희에게 오시는 낙법이시다”(졸시, ‘괭이 손자’ 전문)
고양이에게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장수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목숨이 아홉이라는 원은(怨恩)을 의미하기도 한다. 밤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고양이를 잡아다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았는데 그날부터 여드레를 버텼다고 한다. 죽고 살아나기를 여덟 번, 하루에 하나씩 목숨을 소진한 고양이는 죽었다. 다음 날 원인모를 불이 그 집에 났는데 꼬리에 불을 붙이고 그 집에 뛰어 들었다는 것이다.
목숨 하나를 남겨두었다가 불을 지르고 죽는데 썼다는 원은, 영물의 이야기에 고양이가 있다. 이제 우리사회는 반려동물의 거대한 시장을 이루게 되었고, 이웃나라 중국은 일억 마리의 시장을 이루었다고 한다. 열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반려동물과 지내게 되었다는 말이고, 수천조의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있으니 이제 반려동물은 단순한 동물이기 전에 삶의 층을 바꾸어 놓고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 건강한 자연과 환경을 이루며 사는 조화로운 혜택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영혼을 깨울 줄 아는 동물인 사람의 무책임함에서 비롯되는 악순환이 줄어들고 있지 않다. 항상 이런 것이 문제인 것이다.
유기(遺棄), 관계 속에서 가장 처참한 형벌이고 비인간적인 말이 유기다. 사람도 나이 들어가면서 늙고 병이 든다. 동물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긴 제 부모 자식도 버리는 것이 사람인데 하물며 동물이야 말해서 뭐하겠는가. 일순간만을 탐닉하고자하는 만성질환과 같은 장애자들의 소행이 갈수록 늘어만 가고 있다.
급기야 영혼의 구도를 위해 출가한 스님이나, 성직자가 버려진 반려동물을 거두느라 하루 종일 동분서주하는 모습은 이제 일상이 돼가고 있다. 참선과 기도시간보다 버려진 동물을 위해 뒤치다꺼리하며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 신묘접도를 그릴 때 종교인의 눈물이 흐르는 그림이 있을 법하다.
모란이 핀 꽃밭에서 나비와 놀고 있는 묘접도를 바라보는 지금도 겨울을 건너지 못하고 죽은 고양이의 빛나는 눈빛이 비쳐오는 아침이다. 스스로 슬픈 원은을 만들지 말고 살자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