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호매칼럼>윤동주의 서시(序詩)
정홍순
2018. 2. 14. 10:08
윤동주의 서시(序詩)
호남매일 honamnews@hanmail.net |
2018년 02월 14일(수) 0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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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사상을 읽는 소리다. 그 언어를 두고 제4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로고스라 하였다. 이것을 도(道) 또는 진리라 하는데 인간의 천직, 인간됨을 발휘하려면 바로 이러한 도의나 규범이 있어야한다.
언어가 없으면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라 할지라도 소통의 부재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윤동주에게 언어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삶과 문학을 통해 민족과 이상을 논의할 수 있다.
한국인의 애송시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윤동주의 ‘서시’가 빠지지 않는다. 어쩌면 시인이 마지막으로 책을 묶으며(필사본) 시인의 말, 작가의 변 정도로 쓴 것이 서시인데 시의 제목이 돼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시를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있지 않는가.
지난 달 1월 27일 광양에서는 ‘윤동주문학 왜 광양인가?’라는 주제로 국제학술심포지엄이 있었다. 윤동주는 광양에 한번쯤이라도 다녀간 일이 있었을까. 아마 시인은 몸으로는 광양에 발길을 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윤동주를 말할 때는 꼭 광양이 빠질 수 없다. 시인의 유고(遺稿)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윤동주 시인이 있게 된 것은 그의 언어가 광양에서 보존된 덕분이다. 연희전문학교 졸업 작품으로 필사본 3권을 만들어 스승인 이양하 교수에 한 부, 후배 정병욱에게 한 부, 본인이 한 부를 분산하여 갖게 되었다. 그 중 정병욱이 학도병으로 나가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독립이 되면 원고를 연희전문학교에 전하여 세상에 알릴 것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망덕포구에 자리한 집, 정병욱의 어머니가 독 속에 넣어 보관하여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이다. 쓰레기통 속에서 건진 시인이 ‘송수권’ 시인이라면, 독 속에서 건진 시인은 ‘윤동주’ 시인이다. 한국문학사에서 20대에 요절한 문인들은 이상(1910-1937), 김유정(1908-1937), 박인환(1926-1956), 기형도(1960-1989) 등이다.
이들이 남긴 작품들이 다 한국문학사를 비추는 당대의 별이자 고전적 텍스트이다. 그 가운데 윤동주의 시는 그 만의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성찰의 언어(‘부끄러움’)와 민족주의적 독법언어(‘저항’)라고 유성호 교수는 분석하였다.
윤동주 시인은 학생만 하다가 간 시인이다. 북간도, 평양, 서울, 일본이라는 순환적인 삶 속에서 한 번도 한국인임을 벗어나 본적이 없는 시인이다. 대륙 간(間) 이국에 대한 부끄러움과 저항은 철저하게 한글로만 시를 썼다는 사실에서도 증험되고 있다. 이는 시인의 주체성과 정체성을 한꺼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하다.
윤동주의 시가 정지용, 백석의 시를 앞설 수 있는 것은 대륙의 공간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그에게는 예언자적인 사상과 질박한 동심의 시 세계를 구축하고 있어 ‘시인 윤동주’로서의 가치가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국제학술심포지엄이 한창인 중마동(中馬洞) 락희 호텔에서 컨테이너를 가득 싣고 이순신대교를 빠져나가는 무역선을 보게 되었다. 윤동주의 시와 광양이라는 지역적인 공감이 한순간에 교차된 것이다. 이를 필자는 ‘중마동에서’로 기록할 수 있었으니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제 몸을 밀어야 간다/뿌리쳐야 갈 수 있다/너를 두고는/강이 깊을 수 없고 저 산이 높을 수 없다/먼 이국 향한 뱃머리가/갈매기처럼 햇살 물고 섰다/가다 가다가 꽃잎처럼 떠서/그때까지 내 마음일지 모를 일이지만/매화가지에 네가 돋아나면/별빛 지어 부르던/동주의 노래를 부를 것이다/달 싣고 돌아오던 밤배가 득실거리던/여기는 광양항/복판으로 달리는 말처럼 서서/뱃고동 울리는 中馬洞이다/북간도, 평양, 연희전문학교, 후쿠오카/이국을 서럽게 울던 사람/종말의 닻 부리고/바람 묶은 시간들이 곰삭는 광양에서/사랑 두고는/순질한 너의 시 다 먹을 수가 없다”(졸시, ‘중마동에서’ 전문)
광양이라는 브랜드는 21세기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있다. 이제는 윤동주의 언어를 세계화 시킨 정병욱의 가치를 재조명해야 할 차례이다. 정병욱 교수는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는 말을 하였다.
우리나라에 시인들은 넘쳐난다. 그러나 시인의 사명은 적다. 문학은 위대하나 문단의 정치가 어둡게 하고, 시는 널렸으나 추문이 끈임 없다. 급기야 ‘나도 당했다’는 부끄러운 일들이 속출하고 있다. 그 진위를 시시비비하기도 창피스럽다. 모두가 동주 다울수는 없다. 그러나 부끄럽게 살지는 않아야하지 않겠는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후쿠오카 감옥에서 주사바늘에 죽어간 시인의 시가 혼절한 시대를 찌르고 있다.
/정 홍 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