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빛'을 사랑하는 사람들

정홍순 시인
무술년의 해가 밝았다. 봄은 다시 오겠는가, 민족의 불운 앞에서 울부짖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들판에 서서 가만히 흙을 만져본다. 돌처럼 영원하지 못한 인간의 존재, 그래서 죽음이라고 설명해주는 분신을 만져보는 것이다.
얼굴에 빛이 있듯이 흙이 가지고 있는 빛을 바라본다. 참 다양도 하다. ‘흙빛’을 사전에서는 검푸른 빛을 띠는 색깔이라 적고 있다. 토색(土色)이란 말로 말이다. 그런데 유난히 이 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산과 태안을 아우르는 작가들이 모여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흙빛문학》의 회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1981년에 동인들의 문학회로 시작하여 1983년 창간호를 발간한 후 현재 67집에 이르고 있는 순수문학 잡지이다.
설립목적을 보면 아주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흙 속에서 빛을 캐는 정신’이라는 문학적 가치를 기본 이념으로 하여 순수한 문학정신을 통해 창작활동을 하고, 청소년들의 문학적 상상력을 신장시키려는 취지에서 설립되었음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흙 속에서 빛을 캐는 정신’이라니 선뜻 다가오지 않는다. 하여 《흙빛문학》이 표방하고 있는 설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흙빛’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자연의 빛이며 우리 고향의 빛이다. 모든 생명을 감싸주는 모성의 빛이며 인간 본성의 빛이다. 더불어 그것은 정서의 빛이며 사랑과 평화의 빛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
그들은 그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기에 때로는 “분노의 빛이 되기도 하고, 신음과 절규의 빛이 되기도” 하지만 절대로 잃어서는 안 되기에 “흙을 되찾아야 하고, 흙빛을 되살려야 하고, 흙빛을 심성과 정신 속으로 끊임없이 나가야 하는” 땅의 문학을 천명하고 있다.
땅의 문학이라니 하늘이 검고, 깊고, 오묘하고, 신묘한 현(玄)이라면, 땅은 상생의 대도의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로 황(黃)을 쓰며 어린아이, 노인, 곡식, 황금, 황제라는 뜻이 담겨져 있어 인간을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는 최치원 선생이 말한 현묘지도(玄妙之道)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문학이다.
이에 필자는 어느 날 고구마를 캐며 해를 닮은 색이 흙속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전교생이 강당에 모여 두꺼운 커튼을 치고 영화를 보았다 어두워야 볼 수 있는 빛의 그림자가 있었다 그 후 밤은 낯설지 않았고 별은 항상 따스하기만 하다 조팝꽃이 피면 가끔 묘를 팠다 까맣거나 누르스름한 뼈들은 단단한 것 순으로 회항하고 있었다 빛으로 이번에는 길을 막았고 역력한 후회를 남겼다 어쩌다 꽃이 핀 무덤을 명당이라 하였다 사람에게 삽을 대본 오랜 일이었고 성역을 모르는 삽으로 고구마를 캔다 흙이 익어 갈라진 두둑을 헤치며 이장하듯이 조심스럽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흙내 맡는 일이 징상스럽다 고되고 신비한 눈물어린 날 해를 닮은 빛깔이 흙속에서 나온 것이다”(졸시, ‘흙속에서’ 전문)
흙속에서 해를 닮은 고구마를 캐내듯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도 묵묵히 순수문학에 정진하는 회원들을 십 수 년째 지켜보고 있다. 문단의 시류에 젖어 촐랑거리지도 않는다. 상업적 이익을 위해 상혼의 기술을 적당히 희석하지도 않는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치적을 쌓지도 않는다. 그러면서도 꾸준히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는 《흙빛문학》은 할 일이 많다.
해마다 주민들과 문학기행을 알차게 꾸려나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문인들의 숭고한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추모특집 및 시비건립에 앞장서고 있으며, 청소년문학상을 제정해 문학캠프 및 시상을 꾸준히 시행하고 있다. 이제는 《흙빛문학》 자체가 등단지가 되는 위상에 오르기까지 제12대 이동현 회장(서산중학교)을 비롯한 전 회원들의 수고가 남다르다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계에서도 《흙빛문학》으로 인하여 학생들이 변하고 있다는 평판이 자자하다. 이는 문학의 역할을 당당히 실현해가고 있는 《흙빛문학》이라는 방증이기도 하다. 신입회원을 영입하는데도 투고방을 거쳐야하는 격식을 갖추고 있다. 비록 지방에서 발간하는 잡지이지만 그만큼 자긍심이 있기 때문이다.
서산과 태안은 관광문화가 특별한 곳이다. 아울러 역사와 문화가 깊은 고장으로 내포문화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 《흙빛문학》이 그 자리매김을 하고 있으니 이는 ‘흙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황토정신, 갯벌정신과 맞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향토적 정신으로 함께 만들어가는 《흙빛문학》의 회원들은 고향을 지키고 알리는 일 뿐만 아니라 생명의 빛(흙빛)으로 계시적 사명과 치유적 삶의 원형을 회복하고 있는 역동성을 이끌어가고 있다. 문학의 전 장르를 아우르고 있는 회원들의 고른 작품 활동 또한 《흙빛문학》의 자랑이며 특성이기 때문이다.
무술년은 일본의 침략전쟁을 종식시킨 해이다. 우리는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일본은 전쟁을 통해 시대를 바꿨으며, 도자기로 경제적 부를 구축하게 되었다. 지금껏 우리는 너무 아프다. 그러나 ‘흙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정신처럼 역사와 문화를 튼튼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흙빛문학》이 있으니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