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호매칼럼>우리의 정신온도는 적절한가

정홍순 2017. 12. 20. 10:06

<칼럼> 우리의 정신온도는 적절한가

입력: 2017.12.20 00:00

절기상으로 대설이 지났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 만찬가지로 겨울은 춥다. 사람들은 화석연료로 겨울을 따뜻하게 견뎌낸다.
반면에 동물들은 갖가지 적응방법들이 있다고 한다. 함께 몸을 맞대고 체온을 유지하거나, 피 순환 조절능력으로 동상에 걸리지 않게 하는 등 생존전략이 사람하고는 다른 데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피부를 통해 느끼는 온도를 말할 때 체감온도라고 한다. 이는 풍속·습도·햇볕 등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덥거나 추운 정도를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제 기온과는 관계없이 사람이 직접 느끼는 온도를 체감온도라 하는데 체감온도는 기온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 직접적으로 와 닿는 정도를 말할 때도 쓰이곤 한다.
이와 비슷한 온도, 즉 사회질서 속에서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조성할만한 안정 세력을 받아들이려는 태도 혹은 조성능력을 어느 때보다도 더 실감하며 정유년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다만 온도순응(溫度順應temperature acclimation)의 비유전적 생물체처럼 적응하며 살아가야하는가.
영국의 처칠은 세계 2차 대전 기간 중 불굴의 용기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상징화했다. 히틀러는 히스테리 환자, 편집증적 과시주의자로 불안정을 상징화했다.
이 두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 만약에 영국 국민이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처칠은 그 용맹을 떨치도록 유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독일 국민들이 병들지 아니했다면 히틀러도 광란의 발판을 굳힐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두 사람은 국민들에게서 무엇을 얻어냈던 것인가.
상대방에게 행하고자 하는 참된 인간이 되는 법을 서로 교환하게 되는데 환경온도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극도의 온도는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어느 정도 극복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행복한 공간이 될 수가 없다. 알맞다는 것에서 항상 세계는 균형을 유지하려고 투쟁을 지속하고 있다.
조성되는 환경보다 몸에 밴 환경은 유산이란 말로 값진 것이다. 우리는 같은 환경과 종임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우열 종들이 기생하는 불상사를 지금껏 감내하며 살아왔다.
동물들 가운데 동굴 속에서 잠을 자는 곰 말고는 새끼를 낳지 않는다 하고, 가슴팍에 솜털을 지니고 있는 참새는 가녀린 몸이지만 인간의 체온보다 높은 40°c를 유지하며 산다고 한다.
그들에게도 겨울은 참으로 혹독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돼지라는 비하의 논란 속에서부터 터져 나온 국정농단에 이르기까지 마치 병든 국민들처럼 온도를 상실한 채 난세의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반성하는 것도 잊었는지 모른다. 왜 스스로 미개하다는 말을 들어야 했던가. 나라를 팔게 했고, 부역자로 대통령이 되게 했으며, 국고를 사비 쓰듯 하는 사탄을 섬겨야했을까 말이다. 정신의 온도차가 문제였기 때문이다.
국난에 힘이 되지 못하는 천주학(天主學)을 버리고 동학(東學)을 꿰차고 혁명을 일으킨 전봉준의 칼이 춤추던 그 날을 어찌 농민혁명이라고만 할 수 있겠는가. 천주의 능력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천주학의 영향력이 부족한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후 다시 십자가와 태극기는 광화문에서 촛불과 함께 추운 겨울을 보냈다. 이로 인해 참된 인간이 되는 법이 없는 정신에게는 십자가와 태극기가 무의미한 것임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었다.
같은 유럽이라 해도 해협(English Channel)을 사이에 두고 영국과 독일의 온도차가 달랐던 것처럼 우리는 예산편성이라는 국가 살림살이를 결정하는데도 ‘좌파예산’이라고 거부권을 행사하는가하면, 기득권 싸움으로 치닫는 정치적 공방으로 시한을 넘겨버리는 정치력을 보며 과연 누구를 위한 정당인가를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프랑스는 평화의 무드에 젖어 있다가 독일의 침공을 막을 수가 없었던 교훈을 배워야한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두고도 우리는 임진왜란은 기억하고 있지만 정유재란은 역사에 묻어두고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임진왜란(명을 치기 위한 대외전쟁)이 무엇인지, 정유재란(조선 정벌 전쟁, 도자기 전쟁)이 무엇인지 분명히 구별하여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하고는 분명한 온도의 차이가 있다.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한국의 1000만 촛불시민을 에버트 인권상 수상자로 선정하여 발표하였다. 1000만의 촛불은 정치 이상의 정신이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과거 독일이 불안정의 상징에서 건강한 정신으로 돌아선 의미를 우리는 역으로 읽고 수용해야 할 때이다.
무를 뽑아 김장하고 구덩이를 파 보관했다. 깨끗이 손질해서 보관하는 방법도 있지만 볏짚을 깔고 흙이 묻어있는 무를 구덩이에 넣어두면 겨우내 먹을 수가 있다. 썩지 않고 얼지 않는 것은 적절한 온도 때문이다.
우리는 흙 묻은 것이나 걱정하고, 평화의 무두에 젖어서 오늘을 읽지 못하면 돌이킬 수 없는 난리를 다시 만날 것임을 모두는 명심해야 할 것이다.



< /정 홍 순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