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맞이꽃 피는 농심

정홍순 시인
이슬이 조랑조랑 맺힌 버드나무 길을 걸으며 아침을 맞는다. 먼저 산책 나온 한 여인이 노란 꽃을 솎아 따고 있는 모습이 정겹다. 수크령에 사진기를 들이대고 셔터를 누르고 있는 아내를 기다려주는 남편이 살갑게 보인다. 살짝 목례를 나누고 걷는 발걸음에 콧노래가 흘러나온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피어/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그 이름 달맞이꽃” 김정호의 ‘달맞이꽃’을 흥얼거리며 떼를 지어 노는 물고기들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마침 냇물을 길어 공휴지에 심은 어린 팥에게 물을 주는 한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여든이 되도록 인생 헛살았다고 한다. 말인즉슨 잉어를 잡아 건강원에 맡겼더니 팔뚝 이상 되는 것이래야 약이 되는 것도 몰라 다 버렸다는 자책 석긴 말이었다. 우리는 한참동안 새끼를 거느리고 있는 잉어 떼를 보고 있었다. 농약을 쓰지 않던 때는 참 고기들이 많았었다는 노인에게서 씁쓸한 얼굴을 읽는다.
굳이 공휴지에 농작물을 붙이지 않아도 될 텐데 싶었다. 하지만 노인은 시로부터 승낙 받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그대로 두고 싶지 않아서란다. 그렇게 노인은 몇 년째 소득 없는 농사를 계속하고 있다. 콘크리트 위로 걷어 올린 퇴적토에 심고 또 심는다. 농사처가 없는 것도 아니다. 노인은 그냥 풀을 쳐 내고 올해는 팥을 심었다.
팥으로 떡 해먹으면 얼마나 맛있던가, 맛있더냐고 만 한다. 소박한 아버지 마음, 땅심이 묻어나는 할아버지 마음, 농부의 마음에 젖어보는 행복한 순간이었다. 가끔은 폐 끼치지 않도록 논둑을 걸어보는 것, 밭둑을 걸어보는 것이야말로 둘레길 못지않게 정서적으로 이만한 것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름철에는 아침 일찍 일하지 않으면 일할 시간이 없다. 한낮에는 더워서 들에 나가 일하는 자체가 큰일 날 일이다. 어느덧 예초기로 논둑을 두르고 있는 곳까지 왔다. 마을 이장님이 예초작업을 하고 있다. 비 오듯 얼굴에는 땀이 흘러내리고 예초기는 힘겨운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백제의 미소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논둑에 서있는 달맞이꽃을 베버리지 않고 돌려놓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그늘이 걱정된다 했더니 그늘만큼 덜 먹으면 된다고 한다. 너무 아름다운 농심을 만났다. 친환경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살지만 이렇게 친환경적인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부들이 바다가 내주는 만큼이라고 하듯이, 농부에게도 비료, 농약을 쓰는 여부를 두고 친환경이라는 말을 쓸 뿐만 아니라, 꽃을 꽃으로 돌려놓는 마음이 정작 친환경이었던 것이다.
달맞이꽃, 꽃을 보며 키운 저 논에서 나온 쌀은 얼마나 맛있을까. 저 꽃 같은 마음으로 키운 쌀을 ‘달맞이꽃 쌀’ 이라고 부르고 싶다. 달맞이꽃은 그 효능도 다양하여 이슬에 젖은 꽃 따는 여인이 그 효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야래향(夜來香)이라고도 하는 달맞이꽃의 효능은 이렇다.
달맞이꽃 씨에는 감마리놀레산이 풍부해 기름으로 짜서 약으로 복용한다. 달맞이꽃 씨앗 기름은 혈액을 맑게 하여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추고 혈압을 떨어뜨리며 비만증, 당뇨병에도 좋다. 체내 염증을 유발하는 물질을 막아주고, 여드름이나 습진, 무좀 등 피부질환에 효과가 좋다. 면역력을 길러주며 암세포의 성장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맞이꽃보다 더 건강에 좋은 것을 어디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소도 마다하지 않고 어린순을 잘라먹고 살을 찌니 말이다. 순천에는 예로부터 논농사가 적지 않은 지역이다. 쌀에 붙여진 이름만도 수십 개에 이른다. ‘하늘아래 첫 쌀 순천 햅쌀’ ‘순천미인 쌀’ ‘순천만갈대 쌀’ ‘팔마미인 쌀’ 등 순천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쌀 이름들이 전국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좋은 브랜드에 선호하는 것은 천혜의 자연조건뿐만 아니라 순천인의 농심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멋과 맛을 겸한 풍광수토의 땅 순천에서 생산되는 쌀은 달빛 같은 은은한 향을 버무려 놓은 달맞이꽃 쌀이기 때문이다. 수입쌀이 우리 식탁을 범접하지 못하게 두렁을 두르고 돌아가는 이장님의 뒷모습을 보니 올 농사도 풍년일 것이라고 뻐꾸기는 이 산 저 산 불러대고 있다.
누구는 꽃으로 슬퍼하고, 누구는 꽃으로 건강을 찾기도 한다. 하찮은 꽃일망정 땅에 두고 한철의 생을 미쁘게 살아가는 가난한 농부의 마음에서 피어나는 힘을 보았다. 달맞이꽃으로 피어나는 농심을 보았다. 참 아름다운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