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가정은 우리 삶의 원형이다

정홍순 2017. 5. 29. 07:14
가정은 우리 삶의 원형이다/ 정홍순 시인
2017-05-29 오전 7:12:21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쓸쓸히 혼자 죽어가는 사람들이 늘어 가고 있다. 급기야 사회문제화 되기까지 고독사(孤獨死)라는 것은 이제 연령과는 상관없는 문제가 돼버렸다.

     

    그들에게도 누군가가 있었을 텐데 혼자 쓸쓸히 죽어야하고 방치된 시신은 뒤늦게 부패라는 냄새쯤으로 부고를 알리는 외로운 방법이 사람들에게 쌓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고독한 사회가 아니라 외로운 사회가 돼버렸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야 할 중요한 원형(archetype,原型)이 무너져버린 까닭일 것이다.

     

    본디 가정은 공속성(共屬性)을 가지고 있는 생활공간으로 지상에 사람이 살기 시작할 때부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권익이라는 엄준한 개별주의가 가정이라는 구속력에서 해체를 진행시켰다.

     

    간섭하기도 싫고, 간섭받기도 싫은 깔끔하지만 외로운 존재의 무색주의를 꿈꾸는 사회를 환호하기 시작하였다. 혼자 먹는 밥(혼밥), 혼자 먹는 술(혼술)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설령 돈이 있어도 혼자 식당에 앉아 밥 먹는 것이 멋쩍어 굶고 만다는 사람들도 많다.

     

    최근에는 졸혼(卒婚)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거나 생활의 도움을 받아야할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물론 내 삶을 찾아 떠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가정이라는 역기능도 아주 없잖아 있지만 가정은 우리 삶의 원형이다.

     

    필자의 시 한편을 소개하고자한다. “치렁치렁 오르며/다래넝쿨이 틀어쥔 오리목열매//한수 또 한수/까맣게 복기하고 있는/아내에게/너푼너푼 눈이 내리고 있다//저 납설이 녹아 흐르고/불면의 꽃/달거리 꽃이/창창 피기라도 했으면 좋을//아내가 받은 비나리가 참 춥다” (졸시, ‘아내의 갱년기’ 전문)


    삶의 원형을 잃어버리고 있는 시대에 함께 생각하고, 산다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우리 삶의 근처에서 말하고 싶었다. 가장 가까이 30여년을 함께 생활한 아내의 갱년기를 보면서 결혼이라는 약속을 지켜내기 위해 그녀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말이다. 소녀에서 여자로, 아내와 어머니로 한 사회의 구성원인 그녀가 살아 온 인생은 무엇인가를 말이다.

     

    가정의 원형에는 부성과 모성을 따로 그 우열을 논할 수 없다. 그러나 부성보다 모성에 천착한 것은 이 시대의 영성이기 때문이다. 하비 콕스는 일찍이 《영성, 음악, 여성》을 통해서 시대를 읽는 법을 설파한바가 있다. 근원적 뿌리에로 돌아가 순환적이고, 유기체적인 사고로 문명의 전환기에 선 사람들로 갈증과 공허함을 채우기를 바라서 말이다.

     

    멀리, 어머니 가슴에 매달린 채 죽어가는 어린 것에서부터 “뜨거운 포유/젖에 촉수박고 매달린/삭정이 같은 사막아이가/바람을 안고 마르는 눈곱 사이/햇무리에 타투가 익어간다”(‘젖나비’) 우리들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아,/우리들의 괭이는 괭이눈이라는/괭이밥이라는 토종의 이름을/거닐고 사는 신통한 할아버지시다/할아버지는 호랑이가 아니다/포효하지 않고 갈그랑거리다/꽃이 되고 풀이되는 달빛의 족보다/수틀린 세상에 척척/산을 뒤집고 토담 뒤집어 놓는 꽃/너희에게 오시는 낙법이시다”(‘괭이손자’) 이렇듯 생명의 명령을 부인할 수 없는 지독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지인들과 국밥집에 들러 돼지머리국밥을 먹었다. 조그만 홀이니 옆에 앉은 손님들의 대화나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귀에 들어오고 볼 수 있었다. 젊은 부부가 남매를 데리고 들어와 국밥을 시키고, 아이들도 함께 먹는 것을 보게 되었다. 별 이상할 것도 없는 데 한참이나 지켜보다 그 가정을 생각하게 되었다. 햄버거나 피자를 더 좋아할 아이들에게 국밥집이라니, 저것이 교육이다.

     

    아이들이 국밥집에서 무엇을 배우고, 경험 한 것일까. 어릴 적 부모님과 국밥집에 갔었다는 것 하나를 기억하고 사는 것만도 그렇지 않은 아이보다는 작은 역사 하나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국밥집에서 ‘토렴’이라는 단어는 못 배웠을 지라도 뜨거운 국물에 몇 번이나 말아내는 국밥을 기억할 수 있다면 말이다. 식성을 떠나서 아이들과 국밥집에 들러 한 끼를 모시던 그 젊은 부부에게서 가정이라는 따뜻한 말이 지금도 식지 않고 있다.

     

    가정을 이루지 못하거나 미루게 된 이유가 있다면, 어느 때는 상대가 없어서 이었지만 지금은 결혼해서 살 엄두가 나지 않는 시대를 원망하고 있다. 산아제한으로 둘만 낳아 잘 기르자던 때가 언제였던가. 급속한 고령화시대에 들어서고야 인구정책이 잘못됐다는 것을, 경제적 구도가 어설펐다는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는 것이다.

     

    가정은 개개인이 생활하고 보호받는 터전인 동시에 한 사회를 유지·존속시키는 최소의 단위로서 개인과 사회를 연결시키는 중간 고리라고 할 수 있다. 이 원형의 고리가 건강하게 연결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감당해야 할 일이며 국가적 과업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국가가 가정을 위해서 충분히 일해야 할 때이고, 국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7-05-29 05:26 송고 2017-05-29 07:12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