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게국지는 게탕이 아니다


정홍순
날씨가 추울 때는 고향 음식이 더 그리워진다. 돈이 없어도 나뭇간에는 나무가 있고, 쌀독에 쌀이 있으며, 물두멍에 물이 차 있으면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추운 날씨에 이런 걱정으로 고통 하는 이웃들이 의외로 많이 있어 마음이 아프다. 나이가 들면서 고향 생각이 더 나고,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더 반가운 것은 모두 인지상정인가보다.
고향 소식을 전해 듣다 보면 조금은 바르지 못한 이야기를 접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토를 달고 나설 수는 없지만 고유의 것이 있어야 할 자리와 가치가 분명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얼마 전 EBS <숨은 한국 찾기> 마흔두 번째 여행지 “크리스마스 나무를 찾아서, 태안”이라는 주제로 필자의 고향을 잘 소개하고 있었다. 천리포 수목원과 신두리 사구(천연기념물 제431호), 그리고 ‘게국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게국지라는 말에 얼마나 반갑고,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기다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보는 게국지는 게탕이었지 게국지가 아니었다. 식당 주인이 게국지의 퓨전이라고 설명을 곁들였지만 차라리 ‘묵은지게탕’ 정도가 맞을 듯싶었다. 애써서 소개한 고향 음식을 헐뜯고자 하는 의도는 없다. 시대에 따라서 음식을 잘 계발하는 것이야 칭찬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름에 맞는 올바른 음식을 바르게 전해야하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몫이다.
게국지는 서산·태안 지역 일부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음식이다. 이 게국지라는 말도 갯국지, 겟국지, 깨꾹지 등 여러 말로 불리고 있다. 게장 국물이라 할 때는 ‘게, 겟국’이라 하고, 해산물의 국물이라 할 때는 ‘갯국’이라 하였다. 김장을 한 후에 남은 배추 겉껍질, 무, 무청, 늙은 호박 등을 여느 김장독보다 작은 독(새우젓독), 새우젓독에 담은 가재젓, 황석어젓, 밴댕이젓 속에 푹 묻어두었다가 잘 숙성이 되면 꺼내서 투가리(뚝배기)에 넣고 끓이거나 쪄서 먹는다.
투가리에 담아 끓일 때는 아궁이에서 불을 긁어내 자글자글 끓이고, 찔 때는 밥솥에 넣고 밥물이 넘어가며 익힌 것을 먹는다. 짭조름하면서도 개운한 맛이 말랑말랑 씹히는 질감 덕분에 다른 반찬 없이도 밥도둑이었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던 시절, 김장하고 남은 시래기조차 버리지 않고 겨울반찬으로 이용했던 염장식품이다. 요즈음 지역 전통 음식으로 이름이 나기 시작했지만 게국지의 변형들이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필자의 고향에는 게국지 말고도 이름난 것들이 여럿 있다. ‘무젓’이라고 하는 꽃게 무침, 박과 낙지를 넣고 끓이는 ‘박속밀국낙지탕’, 굴을 재료로 한 ‘굴밥’과 ‘어리굴젓, 조기대가리로 만들어내는 ‘조기젓국’ 등을 들 수 있다. 아마 조기젓국에서 ‘우럭젓국’이 생겨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제사 지내고 제사상에서 물려낸 음식 중에 남은 조기대가리를 그냥 버리지 않는다. 채반에 잘 말려두었다가 쌀뜨물을 붓고 끓여낸다. 투가리에서 바작바작 끓는 조기젓국의 맛과 향은 일품이었다. 후에 우럭으로 그 맛과 방법을 잇고 있어서 우럭젓국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원산도 친구 집에서 우럭젓국에 파래김, 톳무침, 김국을 실컷 먹고 돌아오던 날, 배가 영목항에 닿을 때 내리던 함박눈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잊혀져가는 토속 음식을 널리 알리고, 함께 보전하며 나누는 것은 지역적으로 너무 소중한 일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보를 공유하고, 바르게 알려야 할 책임을 맡은 이들은 조금 더 고증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전해야 할 것이다. 물론 지역에서 이것이 게국지라고 주장한다면 더 할 말은 없겠지만, 옛적부터 먹던 토속 음식이 올바른지 정도는 살펴야 할 것이고, 비슷한 정도의 것이라면 이름을 그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게국지’ ‘조기젓국’을 먹으며 자랐다. 가난한 살림살이에 먹었던 고향 음식이라 더 기억에 남는지 모르겠다. 비싼 어느 음식보다도 영혼에는 훨씬 풍요로운 음식이다. 이처럼 먹고, 보고, 맛들은 기억 속에 고향의 유전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무 곳에서나 쉽게 먹을 수 없는 고향 음식을 생각하며 기억 한 자락 불러내고 싶다.
“죽은 식구 끼니 챙기는 날은 손 푼이 곱절이나 깊어 붓끝으로 흘러내리는 먹물길이 깊어 물려낸 식은 밥덩이 철질한 것들 조기대가리 죄다 먹을 때까지 축문과 지방 사른 불꽃에 오래남아 깊은 기억 속으로 타는 맛 입이 배우고 기억한 기일의 일이다 의식이 예절 되기까지 생전 입으로 호사 엄두도 못 내던 것까지 모다 구전의 기억들이다 죽은 식구위해 차린 날것이래도 익은 것들 슬픔도 점점 덤덤해지는 것들 남은 조기대가리 바작바작 끓여 젓국 상에 둘러앉은 식구들 한참 건너서 개여울에 밀려가는 얼굴 초승달이 파르르 깊던 여름밤”(졸시, ‘조기젓국’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