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뻘배의 이망 15°

정홍순 2016. 12. 5.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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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배의 이망 15° / 정홍순 시인
2016-12-05 오전 9:28:39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 했다. 눈은 내면의 언어를 가지고 있는 소통의 창이다. 맑고 깨끗한 아가들의 눈을 통해 영혼이 비쳐 나오는 것을 보라. 모두가 이런 눈을 가지고 태어나 어쩌다 살기가 등등한 우병우 같은 눈을 가지게 됐는지, 애석한 별이 더욱 차가운 십이월이다.

     

    눈에는 정신이 들어있고, 기가 들어있으며, 온갖 감정을 다 담아놓은 우리 몸의 보배이다. 하여 첫눈과 첫인상은 관계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코드다. 한눈 없는 어머니의 눈을 그려놓고 싶은 것이나, 신의 얼굴에 새겨놓는 눈이 자애로운 것은 완전한 인성과 신성의 발로가 아니던가.

     

    눈으로 사람의 싹이 큰다. 세계를 담고 여는 것이 눈일진대 우주공상에 빠져 있는 요망스런 자의 눈은 분별력이나 혜안이 없으니 우민에 가까운(싸가지 없는) 정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를 탓할 것이 아니다. 같은 눈을 가진 우리의 잘못을 탓할 노릇이다.

     

    눈은 말과 느낌을 반사하여 행동을 찾아간다. 본 대로, 들은 대로, 배운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인성교육의 중요성은 그래서 마음의 등불을 심화시켜야 하는 것이다. 곧, 눈의 교육이다. 진실한 눈, 따뜻한 눈, 착한 눈, 역사의 눈, 겸손한 눈 등 사람 같은 눈으로 눈의 각도와 눈높이가 잘 조절되는 자연스런 눈의 교육이다.

     

    각도는 자연스럽고 알맞을 때 모든 조화가 잘 이루어진다. 넘쳐서도 안 되고, 부족해서도 안 되는 균형과 절제미는 사람 사는 멋을 갔게 한다. 각도를 배우기에 좋은 것들이 참 많다. 어쩌면 조작의 영장인 사람에게 각도는 진보적 유산임에 틀림이 없다. 그 좋은 예로 갯벌에서 사용하는 뻘배가 있다.

     

    벌교 장암리 일원의 뻘배는 해양수산부 국가 중요어업유산 2호로 지정되었다. 1451년 고려사에 강요주(江瑤珠)라고 기록돼 나오는 것을 보면 500년 이상 뻘배의 역사를 가늠케 하고 있다. 나무판자 한 장 타고 다니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갯벌에서 뻘배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뻘배의 명칭 가운데 이망이 있다. 이망은 뻘배가 진행할 때 앞부분이 갯벌에 처박히지 않도록 해준다.

     

    이처럼 뻘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머리 부분인 이망이다. 이망을 만들기 위해서는 소나무나 삼나무를 바닷물에 보름정도 담가두거나 뜨거운 물에 담갔다가 휘어야 한다. 이 때 이망의 각도를 얼마큼 하는가가 관건이다. 각도가 너무 높거나 낮아도 안 된다. 갯벌이 채이지 않고 쉽게 속도를 내며 다닐 수 있는 각도는 15°의 유선형 상태가 되어야 한다.

     

    뻘배의 최적의 상태를 찾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겠는가. 그 15°를 찾기 위해서 말이다. 이처럼 15°는 갯벌을 차고나갈 수 있는 최적의 상태였던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도 예의 각도가 있지 않는가. 누군가에게 목만 까딱하며 인사를 해보라. 그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그것을 누가 정중하다고 하겠는가.

     

    지금 우리 정국이 혼돈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각도가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땅을 측량하는 측량사들에게 각도만큼 중요한 게 없듯이 처음부터 국민을 속이고자 한 각도의 차가 얼마나 컸던가를 이제 모두는 알게 된 것이다. 주5일제가 되면서 금요일을 불금이라고들 한다. 불타는 금요일이란다. 그래서인지 지난 한 달 동안 정말로 불타는 주말을 보내고 있다.

     

    촛불을 들고, 횃불을 켜들고 금하거나 말리지 못할(不禁) 불금 길에서 어린아이들은 촛불과 횃불을 보았다. 그리고 함께 들고 나섰다. 어린 마음에 무엇을 담았을까.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시위마당만 구경한 것으로 남지 않았으면 싶다. 오적을 까부시던 시인도 꼼짝 못하는 준엄한 역사를 눈에 새기고 새겼으면 좋겠다.

     

    거친 겨울 바다는 위대하다, 뻘배를 밀고 돌아와 가지런히 담장에 세우는 아낙들이 위대하다. 그리고 바다는 새로운 갯벌을 만들고, 불타는 민심은 새 나라를 만들 것이니 위대하다. 위대한 역사를 고대하며 조용히 15°의 뻘배를 기다린다.

     

    “썰물 따라/어머니가 몰고 나가시던 뱃길/바람 싣고 건너온 것 생각하면/갈대밭에 가을은 머리부터 왔지요/느려터지게만 오는 줄 알았던/어머니의 하얀 머리카락들/실바람에도 맥 못 추고/가르마도 없이 흔들리는 갈입니다/갯가에 서서/이젠 나도 중년이 되어/목마르게 다그쳐 봅니다/고독이 물러지면 갯벌만큼/고된 날들을 다 받아낼 수 있을까/설움이 엉겨들면/두루미처럼/두 팔 벌리고 사위어 출수 있을까/갈대밭에 서서/뻘배가 나간 길/언제쯤 마지막 배를 몰고 와/풀썩 주저앉은 갈대에 대놓았는지/발끝이 맥없이 접히고 마네요/엊그제 팔순 지나/이쁘게 몰고 다니는 치매랑/갈 빛으로 쓸고 있는 장산 어머니/오늘 어머니 뻘배에/갈꽃만 한 아름 실었습니다”(졸시, ‘뻘배를 기다리며’ 전문)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6-12-05 09:28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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