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무소유의 길을 걸으며

정홍순 2016. 11. 15. 08:33

무소유의 길을 걸으며

정홍순/시인

2016년 11월 14일(월) 18:39
정홍순

[전남도민일보]법정 스님의 ‘오두막 편지’중 한 자락을 펼친다. “진정한 만남은 상호간의 눈뜸開眼이다. 영혼의 진동이 없으면 그건 만남이 아니라 한때의 마주침이다. 사람한테서 하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이다.”사람을 만나는데 있어야 할 영혼의 진동과 하늘 냄새라니 스님의 말을 염두하고 산문을 들치고 들어간다.
사실 사람으로 기뻐하고, 사람으로 상처받는 것이 우리네 인생 아니던가. 생각해 본다. 나는 얼마나 기쁨의 대상이었고, 얼마나 상처를 주며 살았는지. 그래서 시인 김현승은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했던가.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채우길 바라던 시인처럼 조계산 무소유 길을 걸어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산을 찾은 사람들이 많다. 어느 중년 부인이 여기가 순창인지, 순천인지 모르겠단다. 그도 그럴 것이 명산대천 발길 많은 요즘 왜 아니 헷갈리겠나 싶었다. 이곳은 순천시 송광면입니다. 간단히 모국어가 통해서 다행으로 두고 무소유 길에 들어서니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무소유 길은 아름드리 편백나무와 삼나무, 참나무, 대나무 길로 난 800m의 명상의 길이다. 잔잔한 물소리와 새들의 노래로 길동무 삼아 조용히 흙길을 걷는다. “명상은 열린 마음으로 귀 기울이고 바라봄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뒤 끓는 번뇌를 내려놓고 빛과 소리에 무심히 마음을 열고 있으면 잔잔한 평안과 기쁨이 깃들게 된다.”(법정, ‘오두막 편지’중에서) 이렇게 한 짐을 내려놓고 나니 딱따구리가 내는 소리가 제법 목탁소리처럼 들린다.
길은 높아지고 있지만 머리와 가슴은 상쾌해지고, 낙엽과 보드라운 흙을 밟고 걷는 걸음은 어느덧 산과 하나가 되고 만다. 비웠음일까, 채웠음일까 물아일체 같은 이런 순간들을 우리는 몇 번이나 경험하며 살았던가. 덧없는 것들로 힘들어하고, 눈물지며, 탄식하고 오열하며 살아왔는지 스님이 내놓은 무소유를 음미한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법정‘산에는 꽃이 피네’중에서) 맑은 가난, 치열할 것 같으면서도 산의 주인들처럼 가을빛으로 조화로운 삶의 자리를 돌아보며 마지막 모습을 생각한다.
길옆에 유난히 붉은 천남성의 열매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누군가는 저 몸에서 나온 사약을 받고 이슬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머릿속에 붉은 신호등 하나 켜진다. 정지선에서 기다리는 자동차처럼 한참을 멈추고 다시 대나무 길을 오른다. 대나무는 하나하나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온 뿌리로 연결하여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꽃이 피면 한꺼번에 다 죽는 것이 대이기 때문이다.
꽃이 피고 함께 다 마무리하는 그 앞에서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읽는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내려놓음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비움이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용서이고, 이해이고, 자비이다.”(법정, ‘아름다운 마무리’중에서) 산다화가 반겨주는 묵언정진의 집에 들어서서 그 아름다운 마무리의 뜻이 무엇인지 조용히 바라본다.
탯돌에 놓여있는 고무신과 조용히 놓고 간 삶의 흔적들이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는 고요라니 물 한잔 축이고 벽에 걸려있는 청산별곡 사설 한 대목을 읽는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스님이 누어있는 후박나무에 기대어 먼 산을 바라본다. 드디어 나는 잠시지만 청산에 들어있다. 청산은 말이 없고 나는 가야한다. 가서 용서하고, 이해하고, 자비롭게 살아야한다. 무소유의 길을 내려오며 이 길은 진정한 명상의 길, 명상의 길임을 명명하고 돌아오는 발품이 정말 오지다.
이런 영혼의 선물을 받고 순천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 순천만을 중심으로 개설한 남도삼백리 길은 테마별 스토리가 있는 대한민국 실크로드 길이다. 모두 제11길로 순천이 완성한 길, 순천의 문화, 역사, 생명이 넘치는 길이다. 그 길에는 우리들의 작가 김승옥, 정채봉, 법정 스님이 있다.
와온에서 화포에 이르는 제1길 순천만 갈대 길에는 소설가 김승옥과 동화작가 정채봉이 있는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선암사에서 송광사에 이르는 제9길 천년 불심 길 바로 그곳에는 법정 스님이 있는 ‘명상의 길’이 있다. 종교를 떠나서 생전에 이분들이 교우하며 거닐었던 생태의 길, 순천의 길을 걸으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선한 길을 가을이 다 가기 전에 걷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