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공공미술의 불편함

정홍순 2016. 10. 24.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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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의 불편함 / 정홍순 시인
2016-10-24 오전 9:33:13 참살이 mail yongsu530@hanmail.net

     

    정홍순 시인

     

    산마다 불이 탄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산천이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였다. 이 산 저 산 다 불러놓고 단풍놀이를 즐기는 사람들, 이 또한 한철임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노릇이다.

     

    함께 보고 즐기는 것, 이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영화 한편에도 공감하며 울고 우는 사람들, 거리굿에 어깨 들썩이며 흥을 나누는 사람들, 더욱이 자연이 선물한 대향연을 보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을까 싶다.

     

    여행의 계절이다. 어디든 떠나고 싶은 길손들에게 볼거리도, 보여줄 일도 참 많이 있다. 유명한 산천이야 시끄럽게 선전하지 않아도 가 볼 때 되면 다 가보지만, 지방자치별로 준비하는 축제나 가을행사는 홍보전을 타고 뜨겁다 식는 경우가 많다. 소문난 잔치가 더 많아 행락(行樂)이 아니라 개운치 않은 맛을 보고 돌아서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 인상적인 것들, 그 지역의 음식, 역사, 정신이 깃든 향토문화는 두고두고 축적하고 싶은 가치를 둔다. 그러나 본의 아닌 것들로 의아하다가 결국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너희가 하니 우리도 한다는 식으로 일색일 경우나, 제자리가 아닌 아주 불편한 것을 봤을 때 차라리 라는 말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여기에는 공공미술이 있다. 공공미술은 사람들의 정주성을 높여주고(정신), 보다 쾌적한 삶을 가능하게하고(사회),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을 키우며(문화), 문화민주주의와 맞닿은(정치), 문화적 투자로서 고용 촉진하여 경제에 도움을 주는 측면에 이르기까지 공공미술의 진정한 가치는 정신적 빈곤으로부터 해소와 삶의 질이 향상되는 데 있다고 ‘공공미술이란’에서 소개하고 있다.

     

    필자에게 아직도 풀리지 않는 공공미술의 진실이 하나 있다. 부여군청 앞에 세워진 계백장군의 동상이다. 처음 60년대 세워진 장군의 동상이 70년대 기백 없는 동상으로 바꾸어졌고, 버려졌던 원래의 동상은 논산 구자곡초등학교에 세워진 전말이 궁금한 것이다. 또한 가문의 영광을 기리는 것이야 시비 걸 이유 없지만 백제를 멸망시킨 김유신 장군의 송덕비가 부여에 세워진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가 아직도 모르겠다.

     

    정신적 빈곤으로부터 해소되는 것이 공공미술이라 했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다. 우리 지역에도 이런 불편함이 없지 않다. 봉화산 끝자락 동천에는 그물을 뒤집어 쓴 사자가 간혹 물을 토하고 있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처음에는 포효하는 사자의 조형물을 보며 누구의 발상일까 다들 생각하다가 말이 많아지게 됐고, 지금은 그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목욕탕 수준의 공공미술, 그 사자에게 누가 화답할 것인가 참 불편하다.

     

    순천을 상징할 수 있는 말(馬)도 아니고 사자인 것처럼 어느 날 순천만국제정원에는 첨성대가 서문 입구에 화려하게 서서 빛을 받고 있었다. 도대체 저 첨성대는 무엇인가 설왕설래 말들이 많았고, 최근에는 해룡천 옆으로 옮겨져 별처럼 빛나고 있다. 서울 모처에 있던 것을 순천만국제정원으로 옮겨왔고, 다시 한적한 공간으로 밀려나기까지 그 뒷이야기도 궁금하다. 하긴 국제정원에 우리나라, 우리지역을 고집할 수 없지만은 조형물이라 해서 아무것이나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로 알려져 있지만 조명을 받으며 서있는 모습은 관능적인 여인상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이는 역사성을 잃어버린 전시물이기 때문이다. 또한 있어야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봉화산을 형상화한 것처럼 차라리 봉화대를 재현하던지, 팔마비가 담고 있는 청렴을 상징할 수 있는 말(馬)이라면 모르겠다.

     

    공공미술은 대중의 소유와 정신을 담보로 한 것이다. 공공미술정책이 즉흥적이거나 안일한 생각에서 나온다면 정서를 더 빈곤하게 만드는 역할밖에 할 수 없다. 한 장의 벽화일지라도 공공의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띄어나거나 고가의 미술작품이 아니어도 공공미술에는 세금이 운용되고 있으니 경제적 낭비가 돼서도 안 된다. 공공미술, 시민의 마음에 소통의 부재가 선택돼서는 안한 만 못한 것이다.

     

     

    <저작권자©참살이뉴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6-10-24 09:3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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