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없는 하늘 아래


1997년 이원세 감독이 제작한 ‘엄마 없는 하늘 아래’(The World Without a Mother)는 당시 관람객 11만 명의 눈물샘을 자극한 영화였다. 어린동생 둘을 데리고 정신착란에 시달리는 아버지를 둔 영출이가 보여준 꿋꿋한 소년가장 이야기가 대통령의 마음까지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염전에 나가 품삯으로 500원을 받아 동생들을 돌보던 영출이,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입을 틀어막고 엄마를 부르며 오열하던 영출이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아이였다. 눈물을 끼니 삼던 그의 이름, 포대기로 동생을 엎고 있던 영출이, 그를 다시 불러본다.
또 터졌다. 수해난 논둑이 터지듯 또 터졌다. 인천 어린이집 원장의 폭행사실이 안방에 배달되었다. 어린 것을 목욕시키며 시퍼렇게 멍들은 자국을 본 애 엄마는 얼마나 경악했을까싶다. 그 뿐인가 제가 낳은 새끼를 토막 친 애비와 에미의 존속살해, 노인학대 등 때리고 맞고, 죽이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왜 이리도 많은지 정신착란의 나라에서 사는 것 같다.
졸지에 가장이 된 영출이, 13세의 어린 것은 단순한 소년가장이 아니다. 그에게는 그래도 이웃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에 어쨌든 가느다란 정이란 것이 있었다. 또한 가정, 희망이 자라는 아주 작은 꽃이 피고 있었던 것이다.
모던 스쿨(Modern School)의 창시자인 프란시스코 페레는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모던 스쿨 개교식에서 “나는 연설자도 선동가도 아닙니다. 나는 선생입니다. 나는 무엇보다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아이들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유를 위한 헌신으로 젊은 세대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고 연설하였다.
물론 그의 철학과 사상이 다 옳은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무엇으로도 폭력은 안 된다는 말은 특별히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다. 어린 것이 저항도 못하며 맞을 때 엄마, 엄마 얼마나 원망하고 분노하였겠는가.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훈육은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어버이나 스승이 자식이나 제자의 잘못을 꾸짖기 위해 회초리로 볼기나 종아리를 때리는 것을 초달(楚撻)이라 하는데 이는 훈육을 위한 사랑의 매이다. 이 또한 얼마나 조심스러운 것이던가. 말 한마디가 못으로 가슴에 박히면 그는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하는 데 말이다.
앞으로 우리나라가 이런 식으로 나아가다가는 지식인은 없을 것이다. 때리고 맞고 가 아니라 학대가 난무한다는 것은 논리적 사고를 잘라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한다 해도 교사나 어른들의 책임이 80% 이상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내 자식일지라도 아이의 기질과 이야기의 특성을 알아야한다. 아이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눈여겨 볼 수 있는 배려가 없다면 실력 있는 부모나 교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비폭력저항의 지도자 간디는 진리파지운동을 전개한 바 있다. 스스로 마음속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진리(참, 얼)를 간직하고, 이를 잡고서 놓치거나 버리지 않는다는 뜻으로서 이 파지(把持)는 관찰학습의 과정을 이야기한 반두라도 언급한바 모방한 행동을 상징적 형태로 기억 속에 담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환경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언제부턴가 생명경시 사상이 팽배해지고 있어 홍익인간 정신이 무색한 시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물질문화창달이 아니라 정신문화창달이어야 하는데 말이다. 누구라도 어린생명 하나를 물질로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찍이 바쇼는 말하였다. ‘사원의 종소리는 멈추었지만 그 소리는 꽃으로부터 계속 흘러나온다.’고 말이다.
입에 주먹을 말아 넣고 엄마, 엄마 울었을 영출이나 원장에게 얻어맞으며 비정한 인간을 저주했을 인천의 한 어린이처럼 ‘엄마 없는 하늘 아래’로 내몰린 그들의 손에 참(얼)을 꼭 쥐어주어야 할 시대에 절명의 이름을 불러본다. 엄-마,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