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포 왜성 벚나무의 참사


벚꽃하면 진해를 빼놓을 수가 없다. 벚꽃이 만개하고 군항제가 열리는 사월이면 누구나 한번은 가보고 싶은 설렘이 가득한 곳이다.
이처럼 벚꽃은 봄을 대표할만한 꽃이다. 이제는 산마다, 길마다 쉽게 벚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가운데 순천 또한 동천과 호반의 길을 둘러 낙안읍성에 이르는 길은 감탄을 자아낼 만한 벚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젖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아름다운 것만큼 꽃이 겪는 비운 또한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벚꽃을 하늘의 불, 천화(天火)라고 조선왕조실록에서 일컬었던 만큼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는 벚꽃을 보며 예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문학과 예술에서 벚꽃을 사무라이로 표현한 것이 우리들의 심상에 나쁜 꽃으로 맺힌 것이 아닐까 싶다.
수종이 200종이 넘는 벚꽃을 가지고 있다 해서 일본이 벚꽃의 원산지는 아니다. 왕벚나무와 같은 종은 제주도가 원산지라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벚나무에 대한 문헌이 없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로 지정돼 보호 관리되고 있는 신성포 왜성에는 수년전만 해도 벚꽃으로 장관을 이룬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노거수 다섯 그루만이 덩그렇게 서 있을 뿐이다. 누구 소행인지 어느 시책이었는지 묻혀있지만 다만 이런 글은 안타깝게 읽지 않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때 임진왜란을 추억하며 왜놈 후손이 심은 것인데 지금 즐기는 몰역사성”이어서 베어버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한 줄의 글이 슬프다.
기념물과 유적은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고 지파별로 열두 기념비를 세웠다. 요단강을 건넌 후 후손들에게 유적을 남긴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도강을 했는지를 길이길이 가르쳐주고자한 것이 목적이었다. 이렇듯 왜성은 우리의 유적이 아니다. 다만 기념물일 뿐만 아니라 후손이 벚나무를 심었다 해도 식민지를 이식시킨 것으로 해석하는 편향이야말로 몰역사성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은 알고 있지만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에 묻혀 왜곡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명량해전에 대패한 일본군들은 퇴각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는 11개월을 순천왜성에서 주둔하여 정유재란 2년 동안의 절반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임시 수용소 역할을 한 곳이 지금의 신성포 왜성인 것이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의 가신인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 서생포에서 왜성을 쌓고 주둔하고 있었다.
같은 정유재란 당시 쌓은 왜성들이지만 서생포 왜성에는 벚나무가 울울창창하게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는 것에 반해 신성포 왜성은 잡목들 사이로 공단의 기계소리만 무성하게 들리고 있을 뿐이다.
정유재란 당시 왜성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을 순천을 비롯한 근동 지역의 수많은 조상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지략과 애국심은 말할 수가 없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낸 백성들의 전사가 깃든 곳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이다.
특히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16세기 일본 차회(茶會)에 총아로 등장한 덤벙분청 찻그릇이 제작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는 도편이 무수하게 발견되고 있어 그릇들이 신성포 왜성을 경유하여 흘러갔음도 살펴야 할 것이다. “나무 그릇에 밥 말아 먹었던 야마모토족(族)이여/정유재란 때는 소서행장이/남쪽 바다를 건너와 순천왜성을 쌓고/본격적인 도자기 전쟁을 일으켰다”(송수권, 「분청사기와 칼과 국화」부분)
일본의 침략역사에 있어서 순천의 왜성은 정유재란의 중심에 있음을 군사, 문화사적으로 얼마든지 논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왜성의 관할지인 해룡면에서는 정유재란역사연구회(회장 임동규)를 발족하여 정유재란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에 뜻을 같이하여 국가정원도시 순천은 두 번 다시 벚나무를 참사시키는 역사를 남겨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