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물 든 만장 휘날리며


정홍순시인
2016년 4월 4일은 단순히 첫 주를 시작한 월요일이 아니다. 벚꽃들이 허공에 거적을 펴 만발함을 시샘이라도 하듯 추적추적 이슬비가 내렸다. 필자가 카페지기로 운영하고 있는 <송수권의 풍류이야기>에 교수님의 시 두 편을 올리고 보니 묘한 슬픔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 중 한편의 마지막 연을 보면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애인이여, 저 하늘 한 자락 불러다/나 길 뜨는 날,/저 쪽물 받아 족두리꽃 화관 쓰고 올래/놋쇠 요령소리도 구슬피 정든 땅 밟으며/쪽물 든 만장 한 폭도 펄럭이며 올래/내 먼저 숨지면 그 숨 받아 쪽비녀 새로 머리 꽂고/무덤 속 그 하늘까진 머리 풀고 올래/꽃거품 입에 물고 애인이여”(「쪽을 뜨며」에서)
그동안 폐암선고를 받고 병원에서 투병중임을 카페를 통해서 알릴 수는 없었다. 건강이 좋아지기만을 맘 졸여가며 기다리고 있는데 부고를 받았다. 어쩌면 예견이라도 하듯 쪽나무가 꽃을 피기도 전에 떠나셨다. 2016년 4월 4일 12시 41분, 작고의 시간을 적고 보니 야속하기만하다.
수많은 제자들이 계시지만 가까이서 교수님을 뫼시며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이 뭉클 솟아오른다. 지방에서는 유례없는 문학상을 고흥군이 제정하여 시행하고자 할 때 참 많은 말들이 분분하였다. 그것도 문학상을 제정한 같은 지역 문인들의 반대목소리가 더 컸던 것으로 기억된다.
교수님은 당신께서 자원하신 일도 아니고 기금을 내놓으실만한 형편도 아니시라 교수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고흥군의 뜻을 고맙게 여길 뿐 슬퍼하시거나 노하시지도 않으며 끊었던 담배만 다시 태우시고 있었다. ‘내 시의 표준어는 전라도 사투리다’라고 늘 새겨주시던 이 한마디로 답을 대신하였다.
중앙문단을 벗어나 고향을 지키며 지리산을 메치고 한라산을 돌아 만리장성을 남겨둔 채 서정주, 박재삼을 잇는 한국 서정의 큰 줄기로 시업을 이루어냈다. 어쩌면 지리산 뻐꾹새는 산에서 살아야 한다는 이어령 선생의 충고처럼 한 많은 전라도를 뻐꾹새처럼 피를 토하며 노래하였던 것이다.
신춘문예 심사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사투리 시인이라고 몰아냈다는 말을 회상하며 시류에 젖지 마라, 시인은 시로 말해야 한다, 유명한 시를 쓰라 당부하실 때 입가에 씁쓸함을 흘리던 모습 또한 잊을 수가 없다.
이제 교수님은 가셨다. 우리 남도의 가락 한 수가 흘러갔다. 총으로도 칼로도 안 되는 역사를 가락으로 뚫어 낸 것이다. 누구도 교수님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 그럴 필요도 없다. 시와 정신이 그대로 있기 때문이다. 질감 넘치는 모국어로 곳곳마다 이름을 붙여 신처럼 불러내놓고 가셨다.
생전에 다 이루고자하는 것은 욕심이다. 그 욕심마저 내려놓고 제주도 돌담처럼 한 생을 부려놓고 가셨다. 마지막 시집이 그래서 『흑룡만리』이지만 교수님의 시는 계속 될 것이다. 못다 엮은 순천만의 노래 「갈목비」연작시와 순천만에 시비 하나쯤 세워지기를 조용히 기대해본다.
간절한 바람이 있다면 문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지금도 여러 편의 논문들이 나오고 있지만 더 많은 연구서가 발간되기를 바라며, 이미 시작한 외국어번역사업도 중단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관심을 기울이고, 고흥군에서 계획한 생가복원관리와 문학관을 잘 조성해서 문화유산의 가치를 더해주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교수님은 전라도와 한국의 큰 시인이시다. 무등산을 바라보시며 “내가 숨은 줄 알지, 모르는 소리 마라”하신 「무등을 보며」의 한 줄로 만장을 쓰고자 한다. “지어미 지아비/이 악물고/황토에 심은 산/이 삶을 떠나보낼 때/머나먼 강둑에 삽을 깔고 앉아 목 터져라/부른 산” 이제 꿈꾸는 섬으로 가시어 고이 영면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