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신성한 일 좀 잘하고 살자

정홍순 2016. 3. 7. 21:58

[외부칼럼] 신성한 일 좀 잘하고 살자

정홍순 /순천 희락교회목사·시인

2016년 03월 07일(월) 18:45
정홍순 순천 희락교회목사·시인

[전남도민일보]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가 성당의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리고 있다. 쉰 줄에 들어선 아들이 꼭 합격하게 해달라고 빌고 있다.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시험 치르는 아들이 생각난 일이다. 하지만 화재가 위험하다. 아들의 학창시절은 아직 지워지지 않고 어머니의 촛불은 치워졌다.

삼월 하늘이 열리며 개학한 학동들이 학교로 달려간다. 선거구역이 확정되고 총선을 앞둔 후보자들의 행보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어 신성한 일들이 시작된 봄기운이 힘차게 느껴진다. 학생들은 얼마 후 시험을 치르게 될 것이고 사월이면 막내딸도 신성한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학생이 스승으로부터 학습 받아 시험 치르는 일은 점수를 얻기 위한 일이기보다 배운 것을 아뢰어 보답하는 가장 기쁘고 신성한 일이라 했다. 하지만 스승을 앞에 모시고 훔쳐 쓰고, 속여서 답안을 제출하는 일은 벌써 신성한 일을 포기한 것 중 하나이다. 이런 학습경험을 가지고 나와 현장에서 사람을 선택하고 세우는 일까지 자신의 주관이 모자라 덜떨어진 자식 행세하는 것을 어찌 보아야할까.

일꾼을 세우고 선택하는 일에는 선거라는 방법을 어느 곳에서나 사용한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김현승 시인의 시구처럼 올봄에는 모두 신성한 일 좀 잘하게 하소서 기도를 올린다.

역사는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읽는 것이다. 선거역사를 통해 통렬히 반성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야 한다. 장로대통령 만들기의 과오를 범한 것은 한국교회의 슬픈 자화상이다. 물론 장로가 대통령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또한 기독교 위상을 깎아내리고자 하는 말도 아니다. ‘장로대통령 만들자’는 공공연한 언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지도자가 돼서 나라를 밝게 만들고 태평성대를 누리게 한다면 그 믿음의 행실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그러나 역사는 항상 가르쳐 주고 있다. 그게 아니었다고, 대의가 아니고 소의였다고, 이타가 아니고 이기였다고 말이다.

국민의 경제를 담보로 도탄에 빠뜨리게 한 죄는 정의를 몰락시킨 대역죄다. 오직 했으면 어머니, 아버지 선거하셔서 자식들이 실업자가 되고 있다는 말이 생겨나왔겠는가. 끔직하다.

선거에는 지략이 따르는 법이다. 분별할 수 있는 지략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같은 종파, 같은 교단의 장로일지라도 그는 소속교회의 장로이지 우리들의 장로는 아니다. 학연, 지연보다 더 꼴사나운 것이 아무데서나 성직의 직제를 들이대는 것이다. 윤허 스님 말마따나 중 하나 더하는 것인데 말이다.

올봄에는 모두 신성한 일 좀 잘했으면 싶다. 상위 1% 혹은 10% 운운하는 이들의 생각 속에 숨어있는 우매한 대중이라는 말이나 혹은 민중이라는 말이 다시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단단히 박멸시켜야 할 것이다.

이들은 이 시대가 경계해야할 사조인 프리메이슨과 같다. 프리메이슨은 이집트 신비주의 사상과 기하학, 수 신비학 등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만들었다. 이들의 목표는 전 세계의 정치와 경제, 종교를 통합해 세계정부를 수립하고자 하는 암묵적으로 엘리트 의식을 자처하고 있는 집단들이기 때문이다.

선택은 자유이나 잘못된 선택으로 소중한 주권과 국권이 흔들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한다. 그러므로 종단, 종파의 힘을 빌리지 말고 하늘의 뜻을 엄중히 받들 수 있는 순명의 사람을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과거 고무신선거, 막걸리선거, 체육관선거, 종파선거와 같은 퇴폐적인 선거문화가 조금이라도 잔존하지 않도록 힘쓰는 일이야말로 신성한 일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