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무엇을 간직하고 싶은가

정홍순 2016. 2. 2. 13:23

[외부칼럼]무엇을 간직하고 싶은가

2016년 02월 02일(화) 12:26

 

[전남도민일보]정홍순 순천희락교회 목사/시인=누구나 소중히 간직하고 싶은 것이 하나쯤은 있다. 남에게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본인에게는 그 가치야 말로 어떤 것으로도 계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

조기 은퇴하고 자식들이 사는 서울로 떠나기 위해 이삿짐을 싸던 지인께서 필자에게 책 한질을 넘겨주셨다. 학창시절 읽었던 단행본 한두 권 소장하고 있을 뿐인데 열다섯 권 한질을 선뜻 주시기에 너무 감격하여 밤마다 머리맡에 두고 읽은 책이 ‘씨알의 소리’다.

격동의 시대 ‘뿌리 깊은 나무’와 ‘씨알의 소리’는 지식의 산고이며 날카로운 정신이었다. 어쩌다 함석헌 선생의 광주 강연이 있는 날이면 가슴이 두근거리기 까지 했었다. 뿐만 아니라 돈이 생기면 전질을 다 사고 싶었던 필자의 소망이 이루어지다니 가보처럼 간직하게 되었다.

책 한질이 뭐 그리 대수냐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제주 4·3사건을 조명한 대서사시집 ‘흑룡만리’의 저자 송수권 시인은 “기록이 달빛에 물들면 신화가 되고 햇빛에 바래어 지면 역사가 된다고 한다. 한반도의 남국에서 유일하게 창조된 한라 여신들이 빚어낸 신화의 땅에서 벌어진 4·3은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하였듯이 신화와 역사는 기록이라는 산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최고시청률을 자랑하며 종영한 ‘응답하라 1988’에는 1988년 8월20일 출간된 도서출판 오늘에서 발행된 ‘슬픈 우리 젊은 날’이란 시집이 나온다. 이 시집은 당시 100만부를 훌쩍 넘기며 밀리언셀러 시집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이 시집이 다시 복각판으로 나와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데 익명의 시, 낙서의 시, 서클의 시로 이 또한 기록의 산물이다.

오래됐다고 해서 다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로 살아 있는 이 하찮은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사는 것은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성서에 “백발은 영화의 면류관이라”는 잠언이 있다.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분들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구절인데 “정의로운 길에서 얻는다”는 꼬리를 달고 있다. 이처럼 판단 받아 우러러볼 수 있는 인생이란 개인사라 할지라도 우리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 학창시절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며 빵집에서 친구들과 미팅하던 단골가게가 있었다. 호두과자하면 천안이 떠오르듯이 빵집하면 ‘태극당’이었다. 지금은 서로가 원조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태극당’이란 이름을 넘어설 수는 없다. 자그마치 53년의 역사를 말이다. 이는 맛으로 우리의 기억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순천에도 ‘태극당’처럼 유명한 빵집이 있다. 1928년에 문을 연 ‘화월당’이다. 3대에 걸쳐 단일 품목을 고집하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 찹쌀떡과 볼카스테라는 우리의 입맛에 기록한 또 하나의 유산이 되었다.

잠시 나라 밖으로 눈을 돌려보자.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독일로 건너가 광부와 간호사로 벌어들인 외화는 우리 경제의 초석이 되었다. 그 보다 5년여 앞서 시작한 원양산업 참치 잡이로 벌어들인 외화는 20배가 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태평양 사모아 섬에 고이 잠들어 있는 아흔세 분을 비롯하여 선원의 이름으로 낯선 이국땅에 묻힌 ‘인력수출’의 ‘산업전사’들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도 사모아에 거주하며 대한민국 사람으로 살기위해 여권을 갱신하고 있는 분은 조국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기록의 역사나 간직의 역사는 열린 사람의 몫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프랭클린이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의미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삶의 의미가 역사를 움직이게 하고 시대를 정화시키며 사람다운 사회를 만들어가니 말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가. 서로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주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스러움이 배어 있어야 한다. 허황된 꿈에서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며 한 생을 걸고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에 무한한 자산이 들어있고 그 또한 길이 간직할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