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시험 치는 교회, 시험 보는 목사
정홍순
2015. 10. 7. 15:03
시험 치는 교회, 시험 보는 목사 |
2015년 10월 07일(수) 13: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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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전남도민일보]정홍순 순천희락교회 목사/시인= 세상이 흉흉하면 우리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종교적 심성을 가지고 있기에 자신이 속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종교라는 말은‘초자연적인 절대자의 힘에 의존하여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사전은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순천은 살기 좋은 도시로 소문나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대비 복음화 비율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로서 평가받고 있다. 2014년 12월 순천시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 343개소 48,818명 천주교 11개소 14,296명으로 기독교신자 수는 63,114명으로 총 인구 278,903명 가운데 23%를 차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이 같은 통계에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신자들의 수도 포함돼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23%가 넘는 시민이 각자가 속한 처소에서 종교 활동을 행하고 있다. 이처럼 순천은 아름다운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종교적 인성의 고장이기도 한데 언제부턴가 우려 깊은 걱정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종교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를 걱정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회가 걱정하고 있는 종교가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목회자 청빙을 두고 시험 치는 교회, 시험 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목회전문직을 수행하려면 일정 신학수업과 사역경험을 가진 사람으로 고시를 거쳐 임직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여 목회전문직을 수행하는 사람은 의결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소명 받은 사명 자가 사람 앞에 세워지는 것이다. 같은 성직이라 해도 이것이 치리만 하는 장로와 다른 점이다. 문제는 두세 명으로 압축된 가운데 성경본문을 제시하고 같은 본문의 설교를 듣고서 청빙을 결정하겠다는 일이 자행된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가운데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 같은 허탈함을 무엇이라고 말해야할까.
예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시험기관이 된 현장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력서를 들고 줄서는 것은 차치에 두고라도 소위 개혁교회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치 작금의 일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슬로건 하에 설교가 도구이거나 수단, 혹은 평가방법이 됐다는 것은 신앙에서 퇴보한 단면이라 너무 씁쓸하기만 하다.
지금껏 우리사회는 신앙이 흐르기보다 종교를 권하는 통념 없는 사회성을 과시해 왔다. 사실 종교 Religion은 원래의 모습으로 묶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바 신앙 Faith와는 많이도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묶거나 묶여지는 것은 폐해가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종교 안에 있던지 종교에 이입돼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요한 종교는 종교일 뿐이다.
얼마나 큰 구속이어야 하고 속박이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사회는 이제 위대한 종교를 찾지 않는다. 위대한 종교는 거대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혼돈의 사회는 진실한 삶을 고양하고자 하는 신앙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다.
중세교회가 성직을 매매하거나 속죄의 표를 거래하다 무너지고 말았다. 또한 교권과 정권의 싸움 속에서 시대는 암흑기를 맞았고 멸망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해석하지 말아야한다. 일자리로 신앙의 진리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 신앙의 진리에는 구별됨 이란 거룩함으로 세상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 들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상은 끊임없이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청빙 얼마나 가슴 벅차오르는 말인가. 순천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자연과 문화, 역사와 예술, 충절과 신앙 무엇 하나 서툰 것이 없다. 이런 복스러운 대지 위에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받은 것처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복된 땅에 시험 보고, 시험 치는 씨앗을 다시는 뿌리지 말아야할 것이다.
<본 칼럼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필자가 살고 있는 순천은 살기 좋은 도시로 소문나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대비 복음화 비율이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도시로서 평가받고 있다. 2014년 12월 순천시 통계에 따르면 개신교 343개소 48,818명 천주교 11개소 14,296명으로 기독교신자 수는 63,114명으로 총 인구 278,903명 가운데 23%를 차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이 같은 통계에는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신자들의 수도 포함돼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23%가 넘는 시민이 각자가 속한 처소에서 종교 활동을 행하고 있다. 이처럼 순천은 아름다운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종교적 인성의 고장이기도 한데 언제부턴가 우려 깊은 걱정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다.
종교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를 걱정하는 종교가 아니라 사회가 걱정하고 있는 종교가 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목회자 청빙을 두고 시험 치는 교회, 시험 보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목회전문직을 수행하려면 일정 신학수업과 사역경험을 가진 사람으로 고시를 거쳐 임직하는 것이 통례이다.
하여 목회전문직을 수행하는 사람은 의결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소명 받은 사명 자가 사람 앞에 세워지는 것이다. 같은 성직이라 해도 이것이 치리만 하는 장로와 다른 점이다. 문제는 두세 명으로 압축된 가운데 성경본문을 제시하고 같은 본문의 설교를 듣고서 청빙을 결정하겠다는 일이 자행된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가운데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 같은 허탈함을 무엇이라고 말해야할까.
예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로 시험기관이 된 현장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력서를 들고 줄서는 것은 차치에 두고라도 소위 개혁교회라는 이름이 무색하리만치 작금의 일이 벌어지고만 것이다.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슬로건 하에 설교가 도구이거나 수단, 혹은 평가방법이 됐다는 것은 신앙에서 퇴보한 단면이라 너무 씁쓸하기만 하다.
지금껏 우리사회는 신앙이 흐르기보다 종교를 권하는 통념 없는 사회성을 과시해 왔다. 사실 종교 Religion은 원래의 모습으로 묶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바 신앙 Faith와는 많이도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묶거나 묶여지는 것은 폐해가 많은 법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강요하지 않아도 이미 종교 안에 있던지 종교에 이입돼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요한 종교는 종교일 뿐이다.
얼마나 큰 구속이어야 하고 속박이어야 직성이 풀리겠는가. 사회는 이제 위대한 종교를 찾지 않는다. 위대한 종교는 거대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혼돈의 사회는 진실한 삶을 고양하고자 하는 신앙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다.
중세교회가 성직을 매매하거나 속죄의 표를 거래하다 무너지고 말았다. 또한 교권과 정권의 싸움 속에서 시대는 암흑기를 맞았고 멸망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수요와 공급 차원에서 오늘의 이야기를 해석하지 말아야한다. 일자리로 신앙의 진리를 매도해서는 안 된다. 신앙의 진리에는 구별됨 이란 거룩함으로 세상과는 엄연히 다른 것이 들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세상은 끊임없이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청빙 얼마나 가슴 벅차오르는 말인가. 순천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자연과 문화, 역사와 예술, 충절과 신앙 무엇 하나 서툰 것이 없다. 이런 복스러운 대지 위에 아름다운 유산을 물려받은 것처럼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복된 땅에 시험 보고, 시험 치는 씨앗을 다시는 뿌리지 말아야할 것이다.
<본 칼럼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