海漵 칼럼

의식(意識)이 되살아날 때까지

정홍순 2015. 7. 9. 16:36

 
의식(意識)이 되살아날 때까지
2015년 07월 09일(목) 13:43
정홍순 순천희락교회목사·시인
[칼럼=전남도민일보]정홍순 순천희락교회목사·시인=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달이 뜨고 진다.

달이 물들어 차면 은행잎이 떨어지는 가을 애상의 노래 한 수 부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고의 신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은행나무는 유교와 불교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때 은행나무 아래서 공부를 가르쳤다.

은행나무는 자신의 몸에서 독소를 뿜어내 벌레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한다. 그 연유로 인해 혹은 씨를 심어 손자 볼 나이에 열매를 얻을 수 있다해 공손수(公孫樹)라 하기도 한다.

어느 마을 아담한 예배당 앞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아마 예배당을 짓고 기념해 심은 기념식수 이었을 것이다.

아름드리로 자라기까지 수십년의 세월동안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예배당의 역사를 간직한 산증인을 볼 때마다 자랑스럽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상징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은행나무 자리에 주차공간을 더 확보하고자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날 은행나무는 베어지고 말았다. 말 한마디 못하고 죽어간 노릇에 오랫동안 마음이 아팠다.

“땅, 집 팔아 바치는 사람은 많이 봤어도 제 성질 뽑아 바치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못 봤다”는 은퇴목사님의 말 한마디가 떠올랐다.

그럴 수 있구나! 무슨 차이일까! 결국 역사의식까지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의식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는‘자신이 현재 취하고 있는 행동, 또는 처해 있는 상태를 분명히 알고 있는 마음의 상태’라 했다.

즉 행동거지나 정신 상태를 자각하고 있는 것을 의식이라 하는 바 우리는 얼마나 뿌리 깊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조용히 서서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

청년실업인구수가 급증하고 있는 오늘날 신성한 노동의 가치가 호사스런 물질만능에 둘러싸여 직업에도 관이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실리만 쫓는 불안한 사회를 이루어가고 있다.

직업은 직(job)과 업(mission)의 합성어로‘업으로 가면 직을 얻고 직으로 가면 업을 잃는다’는 말이 있듯이 하찮은 일 하나에도 사명의식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일을 통해 자신의 보람과 베풀어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가져야하는 이것이 의식이며 직업관이 아니겠는가.

의식은 물려받는 것이며 가르쳐져야 한다.

고전된다는 것은 엄청난 자산이며 정신이고 얼이기에 황금으로 그 가치를 측량할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것도 구전하여 고유한 문화를 이루고 있는데 하물며 보이는 것을 너무 쉽게 물려주지 못하는 것은 역사를 쓸어 내는 것이며 허무는 행위이다.

100년 된 석조예배당을 하루아침에 허물어내고 현대식 예배당에 수십억을 들여 자랑한들 그 무슨 영광일 것이며 기쁜 일이겠는가.

그것은 업적에 치중한 일이지 계승 발전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고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은행나무 아래서 공자는 공부를 가르쳤다. 보리수나무 아래서 석가는 깨달음을 얻었다.

뽕나무 아래서 예수는 인간을 가르쳤다. 한 나무의 죽음에 비통해하는 것이기 보다 메마른 의식이 통탄스런 것이다.

‘그들 앞에서/이단처럼 누렇게 뿌리고 서 있는 한/타고난 것을 어쩌랴//한번이라도 게으름 핀 적도/성사 버릴 생각도 배반한 적도/원망도 시비도 다 땅에 묻고 살아온/세월에 죽음이 선고됐다//낙엽아, 낙엽아/아픈 열매를 입에 넣고 싶다/역사란 것도 도려낼 수 있구나…’(졸시,「어느 은행나무의 죽음」에서)
한 나무는 베어지고 석조예배당은 허물어졌다. 달을 보며 한 수의 새 노래를 부른다.

의식이 다시 예절이 되기까지 우리의 아름다운 정신문화가 고색창연하게 되살아나기까지 의식화운동이 재개되어야 할 것이다.

<본 칼럼내용은 본사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수도 있습니다.>